‹ 목록으로 여자만 남은 세상의 유혹자

2화

유치원 건물은 회색이었다. 콘크리트 외벽에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다. 입구에 걸린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랑으로 키우는 미래의 여성 리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목이 마른 기분이었다. 다섯 살배기들에게 벌써 저런 구호를 붙이는 세상이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사랑. 키우다. 미래. 여성. 리더. 다섯 단어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중 어느 것도 다섯 살짜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현수막 아래로 원장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치마 정장을 입고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어딘가 훈련된 것처럼 보였다.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하는 각도까지 일정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그게 내 땀인지 어머니 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잘하고 있어." 같은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집을 나설 때. 두 번째는 버스에서 내릴 때. 세 번째는 지금.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스물여섯 해를 살아본 입장에서, 유치원 입학 첫날이 뭐가 그렇게 걱정될 일인지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어머니의 손끝은 계속 떨렸다. 어머니가 손을 놓았다. 나는 그 손이 사라진 자리를 잠깐 쳐다봤다. 따뜻한 게 없어진 느낌. 다섯 살짜리 몸은 그런 사소한 것에도 반응했다. 교실 문을 열자 소음이 쏟아졌다. 아이들 스무 명 정도. 그중 남자아이는 딱 한 명이었다. 비율이 눈에 들어왔다. 1대 19. 정확히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숫자가 저절로 셈해졌다. 그 아이는 교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그 애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반원 형태로. 마치 무대 중앙에 선 사람을 구경하는 것처럼. "이준아, 이거 먹을래?" 과자 봉지를 든 아이 하나가 이준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준아, 내가 그려준 그림이야." 다른 아이가 종이를 흔들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인데, 색깔이 온통 삐뚤빼뚤했다. "이준아, 나랑 놀자." 세 번째 아이가 이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준이라는 아이는 그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는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싫어. 재미없어." 그 말에 여자아이 하나가 울먹였다.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참으려 했다. 그런데 이준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과자 봉지도, 그림도, 팔을 잡은 손도 무시했다. 그 광경을 보는데 속이 뒤틀렸다. 다섯 살짜리 남자애가 벌써 저런 태도를 배웠다는 게 이상했다. 1대 15라는 숫자가,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건가 싶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저런 성격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걸렸다. 이준의 눈이 잠깐 이쪽을 스쳤다. 나를 본 건지, 그냥 시선이 지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눈빛에서 뭔가 계산적인 느낌이 났다. 다섯 살짜리한테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게 웃겼지만, 실제로 그랬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놀이터가 보였다. 그물망이 걸린 정글짐 하나, 미끄럼틀 하나. 아이들이 없는 텅 빈 놀이터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다. 에메랄드그린 눈, 금색과 갈색이 섞인 투톤 머리. 가방에 붙은 이름표를 봤다. 박하은. 하은은 색연필 통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색연필이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서른여섯 개는 될 것 같았다. 색깔별로 흩어진 게 마치 작은 무지개가 깨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다들 이준 쪽에 몰려 있었으니까. 스무 명 중 열아홉 명이 한 방향을 보고 있는데, 남은 한 명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작은 손으로 색연필을 하나씩 주우려 했다. 그런데 손에 힘이 없었다. 색연필이 손가락 사이로 계속 빠져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실패가 반복될수록 하은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섯 살 몸이라 움직임이 느렸다. 의자에서 내려오는 것도, 걸음을 옮기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았다. 스물여섯 해 동안 익숙했던 몸의 감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도와줄게."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누군가를 돕는 건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엎어진 물건은 같이 주워주는 것. 그게 그냥 상식이었다. 회사에서 서류를 떨어뜨린 동료를 도와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은이 나를 쳐다봤다. 눈이 커졌다. 동공이 확장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진짜?"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응. 이거 색깔별로 정리할까." 나는 색연필을 하나씩 집어 색깔별로 나눴다. 빨강, 주황, 노랑. 순서대로 통에 넣었다.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무지개 순서를 지키려고 신경 썼다. 하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말을 하지 않았다. 숨을 참는 것처럼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색연필 정리가 끝나자 나는 통을 하은에게 건넸다. "다 됐다." "고마워." 하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손으로 통을 받으면서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정도였다. 그냥 그 정도의 일이었다. 엎어진 색연필을 같이 주워준 것. 그게 전부였다. 칭찬받을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은의 표정이 이상했다.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목덜미까지 붉은 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나를 향했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뭔가 놓치면 안 되는 걸 보고 있는 것처럼. "나은이 너 진짜 착하다." "...그냥 색연필 주운 건데." "아니, 진짜 착해." 하은이 그 말을 세 번쯤 반복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엔 속삭이듯, 두 번째는 조금 크게, 세 번째는 거의 외치듯이. 주변 아이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준 주변에 몰려 있던 아이들 몇몇도 시선을 돌렸다. 윤소라 선생님도 이쪽을 봤다. 윤소라 선생님은 밝은 갈색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앞치마에 병아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걸음걸이가 빠릿빠릿했다. "나은이가 하은이 도와줬어?" "네." 선생님이 웃으며 다가왔다. "착하네." 짧은 칭찬이었다. 평범한 칭찬. 유치원 교사가 아이에게 흔히 하는 말. 그런데 하은의 반응은 그보다 훨씬 컸다. "선생님, 나은이 진짜 착해요." "응, 알겠어." 선생님이 대충 넘기려 했다. "진짜, 진짜 착해요." 하은은 그 말을 놓지 않았다. 계속 반복했다. 같은 문장을 다른 강세로, 다른 속도로. 윤소라 선생님이 웃음을 거두고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은이 오늘 왜 이렇게 흥분했어." 선생님의 그 말에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방금 그 반응, 정상이 아니었다. 색연필을 주워준 것 정도로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계산이 맞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됐다. 오전 11시 50분. 식판을 받는 줄에서 하은이 내 뒤에 붙었다. 딱 붙었다.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웠다. 줄이 조금 움직여도 그 거리를 유지했다. "나은이 뭐 먹을래?" "몰라. 나오는 대로 먹지." "내가 맛있는 거 골라줄게." 하은은 내 식판에 자기 반찬을 옮겨줬다. 묻지도 않고 그랬다. 계란말이 두 조각. 소시지 반 개. 전부 하은 몫에서 넘어온 것들이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너 줄게." "...괜찮아, 네가 먹어." "아니, 너 먹어야 해." 단호했다. 다섯 살 여자아이의 말투라기엔 지나치게 확고했다. 어른이 협상할 때 쓰는 어조와 비슷했다. 식판을 앞에 두고 나는 잠깐 멈췄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색연필 하나 주워준 게, 밥 몇 조각 나눠 받은 게 이런 반응을 부를 일이었을까. 계산이 안 맞았다. 투자 대비 수익이 너무 비정상적이었다. 오후 2시. 낮잠 시간이었다. 매트 위에 아이들이 하나둘 눕기 시작했다. 파란 매트가 교실 바닥에 스무 개쯤 깔려 있었다. 하은은 내 옆자리를 고집했다. "나은이 옆에서 잘래." 다른 아이가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 했다. 매트 위에 무릎을 대고 앉으려던 순간이었다. 하은이 그 아이를 밀어냈다. 세게. "내 자리야." 밀려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앙앙 울었다. 윤소라 선생님이 달려왔다. "하은이, 왜 그래. 친구 밀면 안 돼." "내 자리인데." 하은의 눈빛이 낯설었다. 다섯 살짜리의 유치한 고집이 아니었다. 뭔가에 완전히 잠식된 눈빛이었다. 초점이 나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선생님이 하은을 다른 자리로 데려가려 했다. 손목을 잡고 살짝 당겼다. 하은이 발버둥을 쳤다. "나은이 옆에 있을 거야!" 소리가 교실 전체에 울렸다. 다른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이준까지 이쪽을 돌아봤다. 그 눈빛에도 뭔가 계산적인 게 스쳤다. 결국 선생님이 하은을 내 옆에 눕게 해줬다. 소란을 잠재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은은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울음도, 발버둥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다 슬쩍 내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 듯이. 나는 그 손을 빼지 못했다. 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상황을 봤으니 예측이 됐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색연필을 주워준 것. 밥을 나눠 받은 것. 그게 이 정도 반응을 부를 일이었나. 아니었다. 분명히 아니었다. 뭔가가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확인해야 할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 확인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은이 내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서 하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런데 손에 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잠들어도 놓지 않겠다는 각오처럼. 교실 안은 조용했다. 아이들 스무 명이 매트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질문이 돌았다. 왜 하은은 저렇게 반응하는가. 왜 이준은 저렇게 무심한가. 1대 19라는 숫자가 이 교실에서 정확히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낮잠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여전히 하은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을 놓는 순간, 뭔가 더 큰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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