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녀장님, 정말 잊은 걸까요?

3화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기억이 없는 것처럼 계속 행동하되,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보기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천장을 한참 바라보며 그 생각을 굳혔다. 어차피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시녀들이 나를 볼 때마다 짓는 그 표정, 그 조심스러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다루는 것 같은 눈빛들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폭탄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닌가.' 계획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을 좀 덜 무섭게 대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대단한 선행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성격을 뒤바꾸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수준에서, 정상적인 인간처럼 굴어보자는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쉬울 거야.'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첫 시도는 뜻밖에도 우물가에서 이루어졌다. 산책이랍시고 저택 뒤뜰을 어슬렁거리다가, 어린 시녀 하나가 물동이를 옮기다가 힘에 겨워 휘청거리는 걸 보았다. 물동이가 꽤 커 보였다. 저 작은 체구로 저걸 나르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나는 별 생각 없이 다가가 동이의 한쪽을 잡았다. "제가 들게요." 시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마치 내가 갑자기 불을 뿜은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손에 힘이 빠져서 물동이가 살짝 기울었고, 물이 한 방울씩 땅에 떨어졌다. "도, 도련님이 왜 이런 걸..." "힘들어 보이니까요." 간단한 대답이었는데, 그 간단함이 오히려 사태를 더 이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시녀는 물동이를 내게 넘기지도 못하고, 받으려 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내가 함정을 놓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이상한가?' 물동이 하나 들어주는 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시녀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당황한 게 맞았다. 몇 초간 그렇게 마주 서 있다가, 결국 내가 동이를 통째로 들어 그녀가 가려던 방향으로 옮겨주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몸이 힘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것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물동이 하나 들 일이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지만, 생각보다 가볍게 옮겨지는 걸 보고 나 스스로도 좀 놀랐다. 시녀는 내가 물동이를 내려놓는 걸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뭐라 말도 못 하고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오후가 되자, 다른 시녀들도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두려움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에 혼란이 겹쳐졌다. 마치 익숙한 계산식에 갑자기 새로운 변수가 끼어든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낮에 그 얘기 들었어?" "물동이를... 직접?" "믿을 수가 없어..." 일부러 못 들은 척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좀 우스웠다. 물동이 하나 든 게 이렇게 대단한 사건이 될 일인가. 식사 시간, 나는 그릇을 내려놓는 시녀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시녀가 그릇을 놓다가 손을 떨어 국물이 조금 튀었다.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연달아 말했다. "괜찮아요. 옷에 안 묻었어요." "저, 정말 괜찮으신가요? 다시 가져올까요?" "아니요, 이거면 됩니다." 시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치며 방을 나갔다. 나는 못 본 척했다. 그날 저녁, 윤서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나를 보는 시선에 뭔가 다른 게 섞여 있었다. 관찰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늘 하루, 이상한 짓을 하셨더군요." "이상한 짓이요?" "물동이를 드셨다고요. 그리고 하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고. 저택 안 사람들이 전부 그 얘기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윤서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잠깐의 침묵 동안, 그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정을 완전히 지우는 데는 실패한 흔들림이었다. "예전에는..." 말을 하다 멈췄다. 스스로 그 말을 삼키는 게 눈에 보였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표정을 가라앉혔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예전에는, 뭐?'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지금 캐물어봤자 순순히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괜히 의심을 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내일 손님이 오십니다. 상단 쪽 사람인데, 저택과 거래가 있어서요." "상단이요?" "물건을 거래하시죠. 도련님이... 전에 자주 만나셨던 상인입니다." 그 말투에 미묘한 거리감이 섞여 있었다. 상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녀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이름이 뭐예요, 그 상인." "한도진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낮아졌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그 사람, 뭔가 문제가 있나요?" 윤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방을 나갔다.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걱정인지, 경고인지, 아니면 그냥 확인인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손이 아주 살짝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도진.'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별다른 의미 없는 상인의 이름일 텐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일이면 그 사람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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