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한도진이 마차를 끌고 떠난 뒤, 저택 안은 이상한 정적에 잠겼다.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는 걸 보면서, 방금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다시 생각해봤다.
"상인을 쫓아 보냈다. 아이를 되찾겠다고 큰소리쳤다."
말은 쉬웠다. 그런데 그다음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기억이 없는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인신매매를 뒤쫓는 정의의 기사가 되겠다고 나선 셈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스운 그림이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 소녀의 겁에 질린 눈을 떠올리면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윤서인을 찾아갔다.
저택 뒤편, 시녀들의 숙소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벽돌 틈에 낀 이끼, 빗물이 스친 자국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것들인데, 뭔가 숨겨진 걸 찾겠다는 마음이 생기니 온 세상이 다 수상해 보였다.
윤서인은 시녀들의 숙소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시녀 두 명과 함께였다. 세 사람 모두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주고받다가, 나를 보자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춰서.
"할 얘기가 있어요."
"지금은 곤란합니다."
윤서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팔짱을 낀 자세도 그랬다. 나를 막아서겠다는 게 온몸으로 드러나 있었다.
"곤란해도 해야겠어요. 그 소녀 얘기예요."
시녀 중 한 명이 낮게 속삭였다. 옆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나한테까지 다 들렸다.
"저 사람, 기억 없다는 거 진짠가요? 갑자기 저런 얘기를 왜..."
"쉿. 도련님 앞에서 그런 말."
다른 시녀가 팔을 잡아당기며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도 다 들은 뒤였다.
"조용히 해."
윤서인이 짧게 자르며 말을 막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눈빛에서 나는 뭔가 계산하는 기색을 읽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무엇을 숨겨야 하나. 그런 계산이었다.
"도련님이 아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날 거기 있었다면서요."
그 말에 윤서인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감정을 완전히 지우는 데는 또 실패한 순간이었다. 아주 짧았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있어.'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네."
"헛소리입니다. 어린애가 겁에 질려서 아무 말이나..."
"윤서인 씨."
나는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존댓말 없이, 그러나 정중하게 불렀다. 옆에 있던 시녀 두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아마 도련님이 시녀장을 저렇게 부르는 걸 처음 본 모양이었다.
"저는 기억이 없어요. 정말로요. 그러니까 제가 뭘 했는지, 뭘 안 했는지, 스스로도 몰라요."
주변 시녀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의심과 경계, 그리고 아주 조금의 당혹감. 아마 저 기억 상실이라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재보는 것 같았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갑자기 딴사람처럼 굴어대는 도련님이라니, 믿을 수 있을 리가.
"그런데 딱 하나는 알겠어요. 그 아이가 저렇게 팔려온 게,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거요."
"그건 도련님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상관할 일로 만들려고요."
윤서인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의심, 경계,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뭔가 다른 감정. 마치 오래 참아온 무언가가 목 끝까지 차오른 것 같은.
"기억이 없다고 하시면서, 갑자기 정의로운 사람이 되신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정의로운 게 아니라, 그냥 이상해서요.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게 이상하지 않다면, 대체 뭐가 이상한 건가요."
"...예전의 도련님도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아졌다. 거의 혼잣말처럼. 나는 숨을 죽였다. 옆에 있던 시녀 두 명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전에요. 그런데 결국은..."
말이 끊겼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정지 속에서, 뭔가 답을 캐내려 애썼다.
'예전의 도련님. 그러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나. 그 사람도 이런 말을 했었다는 건가. 그런데 결국은, 뭐. 결국은 어떻게 됐는데.'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윤서인의 입이 완전히 닫혀버렸다는 걸, 나는 그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 밀어붙이면 아예 대화 자체가 끝날 것 같았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 저택에 내가 모르는 훨씬 더 크고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런 일에 얽혔던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좋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 시녀장의 저 표정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윤서인 씨."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 상인을 조사하고 싶어요. 도와주시겠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궜다. 대답을 미루는 게 아니라, 뭔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다른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어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녀장님! 큰일 났어요!"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이었다.
"마을 쪽 아래쪽에서, 또 애가 하나 사라졌대요. 그리고... 그 상단 마차가 오늘 밤에 다시 이 근처를 지난다고..."
윤서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또 사라졌다니.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잖아.'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상인이 오늘 밤 다시 이 근처를 지난다면, 그 소녀를 되찾을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에, 또 다른 아이가 그 마차에 실려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따라오십시오. 도련님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감추던 문 하나가 억지로 열리는 소리 같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시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게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이 저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뿌리의 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아직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