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부터 나는 나름의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담임이 준 서류에는 없는, 순전히 내 판단으로 정한 것들이었다. 첫째, 소민이 점심시간에 혼자 급식실에 가지 않게 할 것. 둘째, 조퇴가 필요할 때는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담임에게 전달하게 할 것. 셋째, 소민의 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으로 고정할 것.
노트 한 귀퉁이에 그렇게 세 줄을 적어놓고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삐뚤빼뚤했고, 순서도 딱히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들이었는데, 다시 보니 셋 다 결국 하나로 귀결됐다. 소민 옆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서포트 담당이니까, 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대답이 완전히 진실이 아니라는 건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문제였다. 담임은 아마 내가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규칙을 세울 줄 몰랐을 거다. 그냥 잘 봐주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이미 소민의 하루를 통째로 재설계하고 있었으니까.
교실 창밖으로 봄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의 공기였는데, 그 바람이 소민의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 때마다 나는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저 애는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견디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서야, 밥 같이 먹을래?" 소민이 물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마치 거절당할 걸 이미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질문의 끝이 아래로 처졌다. 손끝은 책상 모서리를 만지고 있었고, 시선은 나를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나는 짧게 답했고, 소민은 그 짧은 대답에 안심한 듯 어깨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이런 걸로 안심하다니.
당연한 걸 왜 확인받아야 하지?
그리고 나는 그 안심하는 얼굴이 자꾸 보고 싶어졌다. 안심한 얼굴은 평소보다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고,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좋았다.
*
문제는 그 주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소민과 같은 조에 배정된 하은 무리가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은은 반에서 목소리가 크고 무리 중심에 서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소민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었다.
하은은 원래 나와도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 애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늘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친절함의 온도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애였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다. 그 다정함의 목적이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소민아, 우리 이따 매점 갈래?" 하은이 웃으며 물었을 때, 나는 그 웃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하려고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의 각도는 완벽했지만, 눈은 이미 소민이 아니라 소민의 지갑 쪽을 보고 있었다.
"응, 좋아." 소민은 즉각 답했다.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이.
나는 그 즉각적인 대답이 걸렸다. 좋고 싫음을 판단할 시간도 없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튀어나오는 대답. 저건 대답이 아니라 반사작용이었다.
매점에 다녀온 소민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세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자기 것, 두 개는 하은과 그 친구의 것. 계산은 소민이 했다는 걸 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민의 손끝이 아이스크림 포장지의 습기에 살짝 젖어 있었고, 표정에는 뭔가를 해냈다는 듯한 옅은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만족감이 나를 더 불편하게 했다.
"돈 안 받았어?" 나는 물었다.
"아, 그건... 다음에 갚는다고 했어."
"다음이 언젠데."
소민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는 말이 나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별거 아닌 일이 쌓이면 결국 별일이 된다는 걸, 소민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
하은 무리의 부탁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처음엔 매점 심부름, 그 다음엔 숙제 대신 하기, 그 다음엔 조별 발표 자료를 소민 혼자 밤새 만들게 하는 식으로 조금씩 무게가 늘어났다. 소민은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냈다. 거절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그 과정을 하나씩 지켜보면서, 마치 물이 차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발목까지, 그다음엔 무릎까지, 그러다 어느새 허리까지. 소민은 그 물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자기가 물에 잠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표 자료를 만들던 날, 소민은 점심시간에도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급식실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밥 안 먹어?" 내가 물었다.
"이거 먼저 끝내야 돼서. 하은이가 오늘까지 필요하다고 했거든."
"조 발표 아니야? 왜 너 혼자 하고 있는데."
"다들 바쁘대."
소민은 그렇게 말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생겨 있었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뭔가를 했다는 뜻이었다.
"소민아,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다그치는 느낌이 나지 않게.
"뭐가?"
"네가 다 하고 있잖아. 발표 자료도, 숙제도."
"그냥... 내가 시간이 좀 더 많아서."
"시간이 많은 게 아니라 걔들이 안 하는 거야."
소민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고, 화면의 커서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편해."
"편하다고?"
"응. 뭘 해야 되는지 정해져 있으면, 그게 편해."
그 말이 나에게는 편하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남이 시키는 걸 다 해내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미움받지 않으니까. 명확한 기준이 있으면,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뭔가 화가 났는데, 그 화가 하은 무리를 향한 것인지 소민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편한 게 아니야. 편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하면 소민이 더 움츠러들 것 같았다. 대신 나는 소민의 노트북 화면을 슬쩍 넘겨봤다. 발표 슬라이드는 이미 열 장이 넘어가 있었다. 조원 네 명 중 세 명의 이름이 참여자로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작업한 흔적은 소민의 것뿐이었다.
"이거 이름 빼."
"어?"
"참여 안 한 애들 이름, 빼라고."
"그러면 걔들이 싫어할 텐데..."
"그럼 넌 계속 좋아할 거고?"
소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더 몰아붙이지 않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소민의 손에 빵 하나를 쥐여줬다. 매점에서 미리 사둔 것이었다.
"일단 이거라도 먹어."
소민은 빵을 받아 들고서야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억지스러워서, 나는 그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금요일 오후, 하은이 소민에게 다가와 새로운 부탁을 꺼냈다. 교실 뒷문 쪽, 사물함 근처였다. 나는 마침 책을 가지러 가던 길이었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소민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하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친밀했고, 그게 오히려 더 불길했다. 목소리에 꿀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사람을 구슬릴 때 나오는 특유의 어조.
"이번 주말에 우리 학원 모의고사 있잖아. 너 그거 답안지 좀..."
하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두 사람 사이로 한 발 다가섰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물함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이 하은의 얼굴에 반사되어, 그 표정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답안지 뭐?" 내 목소리에 하은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소민은 나를 쳐다보며 눈을 크게 떴는데, 그 눈에 담긴 건 두려움과 안도가 뒤섞인 무언가였다. 마치 물에 빠졌다가 누군가의 손을 발견한 사람의 눈빛 같았다.
"아, 이서야." 하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 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별거 아닌데 왜 목소리를 낮춰서 말해?"
내 질문에 하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유지하던 웃음의 각도가 아주 조금, 삐걱거리며 흐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