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곁에서만 무너진다

4화

봄비가 며칠째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은 아침부터 뿌옜고,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며 나는 습관처럼 소민의 자리를 살폈다. 사물함 옆에 걸린 우산꽂이가 텅 비어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소민의 사물함을 열어보고 가방 속까지 뒤졌다. 없었다. 역시나였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나는 그걸 확인하자마자 우산 하나를 더 챙겨 넣었다. 소민의 몫으로. 이런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소민이 뭔가를 깜빡하기 전에, 소민이 뭔가가 필요해지기 전에, 미리 채워두는 것. 서포트 담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름이 필요 없어졌다. "소민아, 우산 없어?" 내가 다가가 물었을 때, 소민은 창밖을 잠깐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깜빡했어."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 애의 목소리에는 늘 그런 식의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우산이 없는 것도, 비를 맞는 것도, 그저 오늘 일어난 여러 일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듯이. 나는 그 담담함이 마음에 걸렸다. 소민은 자기 몸이 젖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애였다. 그게 습관이 된 애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같이 쓰고 가자." 우산을 펴며 말했다. 소민은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그 눈빛에는 왜, 라는 물음이 담겨 있었지만 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괜찮은데, 나 그냥…" "괜찮은 거 아니야. 감기 걸려." 나는 더 말을 듣지 않고 소민의 어깨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소민은 몇 초쯤 머뭇거리다가 결국 내 쪽으로 반걸음 다가왔다. * 우산 하나 아래, 우리는 어깨가 스칠 듯 붙어 걸었다. 좁은 우산 속에서 두 사람이 비를 피하려면 이 정도 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어쩔 수 없음이 싫지 않았다. 소민의 팔이 내 팔에 닿을 때마다 그 애가 미세하게 몸을 움츠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게 불편해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불편함이 아니라 낯섦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붙어 걷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반응. 빗물이 우산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 신발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를 밟는 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물 튀기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우리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십 분 동안,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이었는데, 소민과 있을 때의 침묵은 이상하게도 편했다. 오히려 말을 얹으면 이 균형이 깨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빗소리와 우산 아래 좁혀진 거리,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화가 되는 기분이었다. 소민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속눈썹에 옅게 맺힌 물기가, 빗물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작았다. "저기 봐, 물웅덩이." 소민이 문득 말했다. 발밑에 넓게 퍼진 웅덩이가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 웅덩이를 피해 걸음을 옮기며 소민의 팔을 살짝 당겼다. "밟으면 신발 다 젖어." "알아. 그냥 예뻐서." 소민이 웅덩이에 비친 흐린 하늘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잠깐이라서, 나는 그걸 붙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처마 밑으로 들어가며 우산을 접으려던 순간이었다. 소민의 손이 우연히 내 손과 부딪혔다. 그 짧은 접촉에 소민이 손을 확 빼려 했다. 나는 그 손을 놓치지 않고 잡았다. "이서야?" 소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눈이 커진 채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당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버스 올 때까지 이러고 있자."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사실은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저릴 정도였다. 소민의 손은 차가웠다. 비를 맞은 것도 아닌데, 늘 그렇게 차가운 것 같았다. 마치 몸속 온기를 스스로 아껴 쓰는 사람처럼. 나는 그 손을 조금 더 세게 감쌌다. 소민은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마치 내 손을 확인하듯이. 그 작은 움직임이 손바닥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버스 도착을 알리는 전자 안내판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3분, 2분, 1분. 시간이 줄어드는 게 이상하게 아까웠다. "손 왜 이렇게 차가워." 내가 물었다. "원래 그래." 소민이 짧게 답했다. "손 시린 거 안 힘들어?" "익숙해서 모르겠어." 익숙해서 모르겠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소민은 자기 몸의 불편함마저 익숙함으로 넘겨버리는 애였다. 나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들을 하나씩 붙잡아주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고, 그 마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 버스가 오고, 소민이 손을 놓고 올라탄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온기가 이상하게 오래 지속됐다. 버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방울이 우산 위로 조금 더 세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에게 몇 가지 규칙을 더 추가했다. 소민이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끼어들 것. 소민의 연락처는 나 외의 다른 누구도 먼저 알지 못하게 할 것. 소민이 곤란한 상황에 놓이면, 누구보다 먼저 내가 알아챌 것. 소민이 비를 맞는 날에는, 언제나 우산 두 개를 챙길 것. 이 규칙들이 서포트 담당의 업무 범위를 한참 벗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포트 담당은 소민의 일정을 관리하고,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학업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손을 잡고, 손끝의 온기를 하루 종일 곱씹고,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계산하는 건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건 소유욕인가. 아니면 책임감인가. 나는 그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알고 있었다. 이건 둘 다 아니었다. 훨씬 더 단순하고, 훨씬 더 위험한 감정이었다. * 다음 날, 비는 그쳐 있었다. 젖은 운동장 바닥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학교에서 하은이 다시 소민에게 다가왔다. 지난번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소민아, 저번엔 미안했어. 우리 이번엔 진짜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하은의 목소리에는 어떤 계산도 없어 보였다. 그게 오히려 나를 더 경계하게 만들었다. 계산 없는 접근이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소민은 그런 진심 앞에서 방어를 하지 못하는 애였으니까. "우리 이번 주말에 다 같이 놀러 가는데, 너도 올래?" 하은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반씩 섞여 있었다. 소민은 대답하기 전에 나를 슬쩍 쳐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최대한 무심하게 유지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생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시작이구나. 하은 무리가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그 순간 다시 확인했다. 다만 이번에는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부탁이 아니라 초대라는 형태로. 지난번의 서투른 접근이 실패했다면, 이번엔 더 다정한 얼굴을 하고 다시 다가오는 방식이었다. 소민이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내가 무슨 표정을 짓든, 소민은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일 수도, 거절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 쪽도 먼저 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정해주고 싶었다. 다만 그게 얼마나 이상한 욕심인지 알고 있어서 참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볼게." 소민이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하은의 얼굴에 살짝 안도의 빛이 스쳤다. 확답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거절도 아니었으니까. 그 애는 손을 흔들며 자기 무리 쪽으로 돌아갔고, 나와 소민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정적이 잠깐 흘렀다. 나는 소민의 옆얼굴을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갈 거야?" 내가 먼저 물었다. "모르겠어." 소민이 답했다. "너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거지?"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소민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내 속을 짚어낸 건 처음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고, 소민은 그런 내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빗물이 마른 운동장 위로 아침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그 손을 떠올렸다. 어제 버스정류장에서 잡았던, 차갑고 작은 손을. 이번에도 나는 대답을 미뤄야 했다. 하지만 소민의 눈빛은, 내가 대답을 미룰수록 더 오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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