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가도 돼?" 소민이 물었을 때, 나는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교실 창밖으로 4월의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소음 속에서, 소민의 목소리만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소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표정에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누군가에게 뭔가를 물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하은이 소민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지난번과 달라졌다는 걸 알아챈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처음에는 부탁이었다. "이거 좀 도와줄 수 있어?", "이번에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같은 말들. 그런데 최근엔 부탁이 아니라 초대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 이번에 놀이공원 가는데 너도 올래?" 초대라는 건 거절할 명분을 없애버리는 방식이었다. 부탁은 거절해도 되지만, 초대를 거절하면 관계 자체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주말에 누구랑 가는데?" 나는 물었다.
"하은이랑, 그 무리 애들이랑. 넷 정도라고 했어."
"어디로?"
"그냥... 놀이공원이라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이공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초대의 의도였다.
넷이서 놀이공원에 간다는 건, 입장료도 넷이서 나눠 내야 하고 놀이기구 대기 시간도 넷이서 나눠 견뎌야 하고 점심값도 넷이서 나눠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하은의 방식대로라면, 그 '나눠서'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소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잠깐 스쳤다. 소민이 갖고 있던, 남에게 뭔가를 해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그 습성. 나는 그게 소진의 부작용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소민 자신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소민아, 그날 나도 같이 갈게." 나는 그렇게 말했고, 소민은 눈을 크게 떴다.
"이서 너도?"
"응."
"근데 하은이가 좋아할까..." 소민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 말이 조금 지나쳤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지만,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소민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주 목요일, 나는 하은 무리 중 한 명인 지유에게서 우연히 정보를 하나 얻었다. 급식실에서 줄을 서다 들은 대화였는데, 식판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 웅성거림 사이에서, 지유의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소민이 걔, 뭐든지 다 해주잖아. 이번 주말에도 걔 데려가면 입장료도 걔가 낼걸."
"진짜? 걔 왜 그렇게 다 해줘?"
"모르지, 그냥 그런 애야. 부탁하면 다 들어줘."
두 사람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소민이 자판기라도 되는 것처럼,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게 나오는 물건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식판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나기보다 먼저, 어떤 무력감이 밀려왔다. 소민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걸 알면서도, 그 애 자신은 그걸 이용당하는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한다는 사실이.
내가 아무리 옆에서 막아도, 소민 스스로 그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거였다. 그게 답답했다. 지유와 그 친구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듣기만 했다.
나는 그날 저녁 소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말 놀이공원, 나랑 둘이서만 가자.」
몇 초 만에 답이 왔다.
「하은이 무리는?」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짧은 대화창을 다시 열어보곤 했다.
*
다음 날 나는 하은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이었다. 하은은 복도 창가에 서서 다른 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자 말을 멈추고 나를 봤다.
"소민이 이번 주말에 안 갈 거야."
하은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스쳤다.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왜 네가 정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소민이가 정한 거야. 근데 그 결정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강이서, 너 진짜 이상하다. 왜 소민이 일에 매번 끼어들어?" 하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게 섞였다.
나는 그 질문에 잠시 멈췄다. 왜 매번 끼어드는지, 그 답을 나 자신도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니까.
"서포트 담당이니까." 나는 가장 안전한 대답을 골랐다.
"서포트 담당이 이렇게까지 해? 소민이 친구 관계까지 다 관리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말이 정확히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서포트 담당이라는 명목으로 소민의 일상 전체를 통제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순간 스쳤다. 하은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자기가 방금 던진 말이 나를 흔들었다는 걸 아는 눈빛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하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등 뒤로 하은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
그날 밤, 나는 소민에게서 예상치 못한 문자를 받았다.
「이서야, 나 사실 하은이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었던 것도 있어.」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방 안의 불빛이 핸드폰 화면에 반사되어 눈이 조금 시렸다.
「그런데 이서 너랑 둘이 가는 것도 좋아.」
그 문장 뒤에 이어진 이모티콘 하나가, 웃는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고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소민이 처음으로 자기 마음의 일부를 솔직하게 드러낸 순간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소민은 늘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쪽이었다. 하은이 원하면 하은에게 맞추고, 내가 원하면 나에게 맞추고. 그런데 지금 이 문자는 달랐다. 하은이 원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라, 소민 자신이 원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럼 우리 둘이 먼저 가고, 나중에 다른 애들이랑도 가.」
「응, 그렇게 하자.」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 뭔가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소민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의견에 완전히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걱정이 들었다. 소민이 조금씩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그 목소리가 언젠가 나를 향할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지금 소민을 지켜주는 방식이, 언젠가 소민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간섭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 그 생각이 들자, 방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 위로 옅은 불안이 겹쳐 앉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소민의 웃는 이모티콘이 눈앞에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하은은 결국 그 주말,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접근했다. 놀이공원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월요일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교실에 들어섰다. 아이들 몇 명이 게시판 앞에 몰려서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무심코 다가갔다가, 게시판에 붙은 조 편성표를 발견했다.
종이 위에는 익숙한 담임의 필체와 함께,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와 소민의 이름은 서로 다른 조에 나뉘어 적혀 있었다. 담임의 서명까지 찍힌, 이미 확정된 편성표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종이 위의 이름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소민의 이름 옆에는 하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