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서아 시점]
태은이 계단 아래로 사라진 뒤, 나는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문고리는 차가웠고, 손끝에서 그 냉기가 팔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닿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있는 방은 여전히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 어둠이 다시 나를 짓누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을 열지 않고,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몇 번 들이쉬었다. 폐 안 가득 찬 공기가 도무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결국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어둠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책상, 그 모든 게 오늘 밤엔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듯 뛰기 시작하면,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벽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다가, 바람이 불면 그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조차 나에게는 위협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시간에 나는 몇 번이나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 선생님의 부름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옆자리 친구가 팔꿈치로 슬쩍 찌르며 "야, 침 흘렀어" 하고 웃었지만, 나는 웃을 힘도 없었다. 급식실에서 젓가락을 들다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다. 국그릇 앞에서 그대로 의식이 몇 초쯤 끊겼다가, 옆에서 누군가 "이서아, 괜찮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이틀째 밤에는 결국 스탠드를 켠 채로 뒤척였다. 방 안이 밝으면 조금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빛이 눈꺼풀을 자꾸 자극해서 더 잠들 수 없었다. 나는 스탠드를 끄고, 다시 켰다가, 또 껐다. 그 반복 속에서 시간이 새벽 세 시를 넘겼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체육 시간에 서 있다가 그대로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 운동장 트랙 한복판, 아이들이 줄지어 서서 준비 운동을 하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세상이 옆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넘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상하게 또렷하게 생각했다. 아, 나 지금 넘어지는구나. 그런데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놀란 목소리, 체육 선생님이 뛰어오는 발소리, 그 모든 게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보건실 침대에 눕혀졌을 때, 나는 눈을 감으면서도 잠들지 못했다. 몸은 완전히 지쳐 있었지만, 정신 어딘가는 계속 경계를 놓지 않았다. 마치 몸과 정신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 같았다. 한쪽은 끊어질 듯 늘어지고, 다른 한쪽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괜찮아요?" 보건 선생님이 물었다. 손목을 잡고 맥박을 재던 손길이 부드러웠다.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선생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네. 그냥 좀 쉬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쉰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밤이 되면 나는 다시 302호의 어둠과 마주해야 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스탠드를 켜놓아도, 헤드폰으로 백색소음을 틀어놔도 소용이 없었다. 몸이 무거운데 정신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끊어질 듯 긴장되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던 그날, 병원 복도에서 언니와 함께 서 있던 그 겨울밤이 자꾸 떠올랐다. 형광등 불빛 아래, 언니의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세상이 다시 무너질 것 같은 그 공포가.
그날 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의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언니는 내 손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얗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잡을 손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밤, 나는 결국 방을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몸은 이미 한계였다. 눈앞이 흐릿하게 흔들렸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 손잡이를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2층 라운지 앞을 지나칠 때, 그날 밤의 기억이 스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날과 달리 라운지는 어둡고 조용했다. 소파도, 테이블도, 모든 게 그날 밤과 똑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 위에 있던 두 사람은 없었다.
대신, 계단 아래 작은 연습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서투르지 않은, 익숙한 코드 진행. 몇 번을 반복해서 치는 걸 보면, 뭔가를 연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문을 두드렸다. 손이 떨렸지만, 더 이상 물러날 힘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노크 소리가 내 심장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문이 열렸다. 태은이었다. 이번엔 혼자였다. 기타를 무릎에 걸친 채,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예상했다는 듯한 여유가 있었다.
"또 왔네." 태은이 말했다. 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웠다.
"저…"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 좀, 도와주세요."
태은은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표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장난기 대신 다른 무언가를 봤다. 어쩌면 흥미, 어쩌면 계산─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분명 뭔가 새로운 것이었다.
"뭘 도와줘."
"저 진짜, 며칠째 한숨도 못 잤어요." 나는 말을 쏟아냈다. "눈만 감으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숨이 안 쉬어지고…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걱정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번 터진 말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체육 시간에 넘어졌어요. 아까. 애들이 다 봤어요. 보건 선생님도 괜찮냐고 물었는데,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방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요. 불을 켜도, 꺼도, 이불을 덮어도 소용없어요."
태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어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말한 거 기억나?" 태은이 물었다. "다음에 만나면 뭔가 받아야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냥, 오늘 밤을 어떻게든 넘기고 싶었다.
"부탁이 있어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 밤만, 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냥 옆에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부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것도 며칠 전 은밀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 순간, 태은은 이 건물 안에서 내가 유일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깨닫자 더 서글퍼졌다. 나에게는 정말로 아무도 없구나. 언니는 멀리 있고, 친구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없고, 결국 남은 건 며칠 전 밤 우연히 마주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선배 하나뿐이었다.
태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정지의 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기타 줄 하나가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그거 진심이야?" 태은이 물었다. 놀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에요."
태은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의 의미를 나는 그때 읽어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동정의 미소가 아니었다. 뭔가를 손에 넣은 사람의 미소였다.
"좋아." 태은이 대답했다. "그럼 가자."
너무 쉽게 승낙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태은은 기타를 벽에 세워두고, 나를 앞질러 문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으며,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른 종류로 바뀌는 걸 느꼈다.
복도의 불빛은 드문드문 꺼져 있었다. 태은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 걸음을 따라가며,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며칠 전 라운지에서 봤던 그 장면─태은과 임하늘 선배가 함께 있던 그 모습이 자꾸 눈앞에 겹쳐졌다.
302호로 향하는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날 밤과 달리, 내 옆에는 누군가 걷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발밑의 어둠이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잠깐 망설였다. 태은은 내 망설임을 눈치챈 듯, 먼저 안으로 들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뭘 그렇게 봐." 태은이 말했다. "눕든가."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몸을 눕혔다. 태은은 그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보기 시작했다.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만약 태은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면, 나는 오히려 더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감자, 며칠 만에 처음으로 심장이 조금씩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갈비뼈를 두드리던 그 빠른 박동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간격을 벌리며 잦아들었다. 옆에서 핸드폰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 소리, 이불이 스치는 작은 소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렸다.
"저기."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임하늘 선배는… 괜찮아요?"
태은의 손끝이 핸드폰 위에서 멈췄다. 짧은 정지였다. 그 정지가 너무 짧아서,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몰랐다.
"그건 왜 물어."
"그냥, 신경 쓰여서요." 나는 그날 밤 라운지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태은의 손이 하늘 선배의 옷깃을 잡던 그 순간, 그 순간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태은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뭔가 설명하기 애매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즐거움과는 다른, 조금 더 서늘한 종류의 웃음.
"신경 쓰지 마." 태은이 말했다. "그거보다, 너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이렇게 옆에 누가 있으면 진짜 잠이 와?"
그 질문에는 어떤 실험적인 태도가 섞여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려는 듯한. 하지만 그때 나는 그걸 눈치챌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나는 이미 스르르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며칠 만에 처음 찾아온 잠이었다. 몸의 모든 근육이 한꺼번에 풀리는 느낌, 며칠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이 드디어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의식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직전, 나는 어렴풋이 태은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이렇게 쉬울 줄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그 순간의 나는 물을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밤이,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훨씬 복잡한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태은의 눈빛 속에 스쳐 지나간 그 계산이, 결코 순수한 동정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그날 밤, 태은의 옆에서 처음으로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그 잠이, 얼마나 위험한 대가를 요구하게 될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