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계속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도헌은 여전히 하루에 한 번은 장미궁을 다녀왔고, 나는 매일 밤 홍차를 준비했지만 그가 다 마신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찻잔이 식어가는 걸 보는 것도 이제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처음엔 서운했는데, 요즘은 그냥…… 습관처럼 지켜보게 됐다. 어쩌겠어. 안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열흘쯤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
"영애께서는 좀 나아지셨나요." 나는 조찬 자리에서 무심하게 물었다.
숟가락을 든 채로, 시선은 접시 위에 둔 채로. 정말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아니, 실제로 별 관심 없어야 했다.
"아직 열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군."
"의원은 뭐라고 하고요."
"큰 병은 아니라고 하는데, 워낙 몸이 약해서 시간이 걸린다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대화였다. 왕비가 왕에게 손님의 상태를 묻는 것, 흔한 일이다. 예의 바르고, 무해하고, 그 어떤 트집도 잡을 수 없는 질문.
그런데 자꾸만 궁금했다. 그 영애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사진 몇 장으로만 봤던 얼굴, 그 얼굴이 지금 이 궁 어딘가에서 도헌의 발걸음을 매일 붙잡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제가 한번 문병을 가볼까요."
도헌이 나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재밌어서,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마주 봤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왕비로서 손님을 챙기는 것도 도리 아닌가요."
그는 잠시 나를 살피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는데, 뭘 가늠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걸지도.
"그럼 그렇게 해라. 다만 무리하게 하지는 말고."
무리? 내가 뭘 무리한다는 건지. 문병 한 번 가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 무슨 소리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건지.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오후, 나는 미란과 다혜만 데리고 장미궁으로 향했다. 옷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골랐다. 문병 가는 사람이 초라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이유를 붙였는데, 사실은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원을 지나는 동안 다혜가 옆에서 계속 눈치를 봤다.
"왕비님, 괜찮으세요?"
"뭐가."
"아니…… 그냥요."
나는 대답 대신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했다. 정원의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도헌의 목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깐 그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는데, 목소리 톤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평소 나한테 쓰던 어투랑은 확실히 달랐다.
그게 좀, 낯설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니,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 침대에 백설아가 앉아 있었다.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여리고 하얀 얼굴이었다. 창백함이 병색보다는 원래의 살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불을 무릎까지 덮은 채로,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흰 장미 한 송이와 꿀 탄 홍차가 놓여 있었다.
내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숨이 잠깐 막혔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 목구멍에서부터 차오르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화인지 슬픔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냥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왕비님." 백설아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런 자세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앉아 계세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잘했어, 지금까지 십 년 동안 이런 표정 관리 연습을 해온 보람이 있네.
도헌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인, 마침 잘 왔다. 영애께서 통 식사를 안 하셔서 걱정이던 차였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대신, 탁자 위의 흰 장미를 응시했다. 흰 장미는 궁에서 흔한 꽃이 아니었다. 정원사가 매일 아침 딱 한 송이만 잘라, 내 방으로 보내는 특별한 품종이었다. 그 꽃이 여기, 이 방 탁자 위에 있었다.
기억이 하나 스쳤다. 처음 이 궁에 들어왔을 때, 도헌이 직접 그 장미를 내 방 창가에 놓아주며 했던 말.
"이건 아무한테도 안 준다. 너한테만 주는 거다."
그때는 그 말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왕이 하는 애정 표현이란 게 다 이런 식으로 딱딱하고 명령형이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말을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한테도 안 준다는 말, 그 말 하나가 몇 년을 버티게 해줬던 것 같다.
"그 장미는 어디서 온 건가요."
내 물음에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아, 그건……" 백설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손수 가져다주셨어요. 매일 아침에요."
매일 아침.
내 방에 오지 않았던 그 흰 장미가, 여기로 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며칠 전부터,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내가 창가에서 빈 화병을 보고도 그냥 넘겼던 그 날들부터였을까.
"그리고 이 차는요." 나는 홍차 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꿀이 들어간 것 같은데."
"제가…… 원래 단 걸 좋아해서요. 폐하께서 신경 써주셔서."
웃으며 하는 말이 참 순진해 보였다. 이게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면서 하는 말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저 미소 하나로 이 방 안의 온도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나는 도헌을 봤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뭔가 숨기려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이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손님을 위한 배려일 뿐이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애의 건강을 위해서다."
"그렇겠죠."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저와 폐하 사이의 방식이었잖아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방 안 온도가 갑자기 몇 도 내려간 느낌이었다. 미란이 옆에서 살짝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도헌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일로 서운해할 것까지야 있느냐. 사소한 것 아닌가."
사소하다니.
머리가 잠깐 하얘졌다. 사소하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뱉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나한테는 사소하지 않았던 것들이, 저 사람한테는 처음부터 사소했던 걸까. 아니면 지금 나를 앞에 두고 저 여자를 감싸느라 급하게 갖다 붙인 말일까.
"네, 사소하죠." 나는 웃었다. 웃는 게 이럴 때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라는 걸, 나는 십 년 동안 배웠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영애께서는 얼른 나으시길 바라고요."
방을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미란과 다혜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혜가 몇 번인가 입을 열려다 다시 닫는 게 느껴졌다. 발소리만 또각또각 복도에 울렸다.
복도 끝에서 시녀 하나가 지나가다 나를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그 시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봤다. 궁 안에 무슨 소문이 벌써 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건지.
장미궁을 벗어나 정원에 들어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내쉬었다. 정원의 흙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왕비님." 미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배고프다, 우리."
미란과 다혜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게 보였다. 이 상황에 밥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 나도 알아. 나도 내가 지금 이 소리를 할 상황인가 싶으니까.
그런데 정말 배가 고픈 걸 어떡해.
걸음을 다시 옮기면서도, 사소하다는 말이, 생각보다 오래 귀에 남았다.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사소한 것, 사소한 것. 십 년을 함께한 부부 사이의 작은 약속 하나가, 그 사람 입에서는 그렇게 가벼운 단어로 바뀌어 나왔다.
정원을 다 지나 궁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봤다. 장미궁의 지붕이 나무 사이로 살짝 보였다. 저 안에서 지금도 도헌이 그 여자 곁에 앉아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 건지, 알고 싶은 건지도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