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도헌이 침소로 찾아왔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촛불 하나만 밝혀둔 방 안이 유독 조용했다. 시녀들은 이미 물러가고, 나는 이불 위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방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평소라면 문 앞에서 기척부터 냈을 사람인데.
이상하다,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서인, 낮에 있었던 일 말인데."
나는 책을 읽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척, 눈은 여전히 글자 위에 있었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미와 차 이야기.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덮고 그를 바라봤다. 촛불이 그의 얼굴 절반만 비추고 있어서, 표정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게 더 답답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요."
"영애는 아프고 약한 사람이다. 그런 사소한 배려까지 왕비의 소유물처럼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소유물.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언제 그걸 소유물처럼 굴었지. 그냥, 우리가 십 년 동안 매일 아침 함께 마신 차였을 뿐인데. 그게 소유물이라면, 세상 부부들이 나누는 아침 인사도 다 소유물이겠네.
"저는 그걸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다만 그건 우리 둘의 약속이었잖아요. 결혼하고 십 년 동안 지켜온."
"약속이라기보다는 습관이지."
습관이라니. 십 년을 습관 하나로 정리해버리는 그 태도가, 그날 대화에서 가장 아팠던 부분이었다.
그럼 나는 십 년 동안 뭘 한 거지. 그냥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차를 우리고, 습관적으로 이 사람 옆에 앉아 있었던 건가.
"그럼 그 습관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나눠주실 수 있는 거네요."
"서인, 그렇게 감정적으로 몰아가지 마라."
감정적. 이 남자가 요즘 가장 즐겨 쓰는 단어였다. 요즘 들어 부쩍 이 단어를 자주 쓴다는 게, 오히려 더 우스웠다. 내가 뭘 감정적으로 몰아갔다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왕비가 왕에게 이런 질문 하나 하는 게 감정적인 건가요."
그는 미간을 좁혔다. 촛불 아래 그 표정이 유독 낯설게 보였다. 십 년을 봐온 얼굴인데도, 요즘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대는 왕비다. 사적인 서운함을 정무의 영역까지 끌고 오면 안 된다."
"이게 정무예요?"
"영애는 청림 백작가의 딸이다. 그 가문과의 관계는 국정과 직결된다. 왕비도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나는 짧게 웃었다. 그게 정말로 웃겨서가 아니라, 웃지 않으면 다른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예를 들면, 그 국정이라는 게 참 편리한 단어네요, 같은 말.
"알겠어요, 폐하. 이해할게요."
형식적인 존댓말이었다. 그는 그걸 알아차렸는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다 잦아든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책은 이미 덮은 지 오래였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냥 촛불만 바라봤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십 년이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짧은 시간이었나. 습관이라는 말로 정리되어버릴 만큼.
배는 고픈데 입맛은 없고, 잠은 안 오는데 눕고는 싶은. 딱 그런 밤이었다.
다음 날, 다혜가 찾아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방 안 가득 들어와 있었는데도, 다혜의 표정은 유독 어두웠다. 평소 같으면 웃으면서 들어왔을 아이가, 오늘은 문턱에서부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왕비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나는 자수를 놓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실이 살짝 엉켰지만 그냥 두었다.
"폐하께서 요즘 장미궁을 거의 매일 가신다고 들었어요. 오늘도 아침 일찍 다녀오셨고요."
"그래."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궁 안에서 도는 소문이라는 게 원래 왕비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나는 자수를 놓던 손을 멈추고 다혜를 봤다.
"이상한 거?"
"장미궁 시녀들 말로는, 영애의 증상이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던데요. 요양이 필요한 정도지, 매일 왕이 다녀갈 정도는 아니라고.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시니까,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도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이 도는데."
다혜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결국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눈은 나를 똑바로 못 보고 자꾸 바닥을 향했다.
"이건 저도 확실한 건 아닌데요…… 영애가 폐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병세를 조금 더 부풀리는 것 같다고, 그런 소문이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이 상황이 이미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병이 진짜든 가짜든, 도헌이 매일 찾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십 년 동안 매일 찾아온 건 나였는데. 이제는 그 자리가 다른 사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가 그런 소문을 냈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영애 곁에 누가 있는지는 알아?"
"청림 백작가에서 데려온 시녀 한 명이 있다고 하는데, 저도 얼굴은 아직 못 봤어요."
시녀 한 명.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백작가에서 굳이 시녀를 딸려 보낼 정도라면, 그냥 시중 드는 아이는 아닐 것 같았다.
이 궁 안에서 새로운 사람 하나가 조용히 움직인다는 것. 그게 좋은 신호일 리가 없었다.
그때 미란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딱딱했다. 걸음걸이도 급했다. 미란답지 않게.
"왕비님, 장미궁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어 눈여겨보시라고 전해드리려 왔습니다."
"누군데."
"영애의 시녀입니다. 방금 정원 쪽으로 나가는 걸 봤는데……"
미란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확신이 서지 않는 표정이었다. 평소 확신 없는 말은 아예 꺼내지 않는 사람인데, 그 미란이 이렇게 말끝을 흐린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그런데?"
"뒷모습이, 낯익어서요."
낯익다니. 이 궁에 낯익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수틀이 옆으로 살짝 밀려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창가로 다가가 정원을 내려다봤다.
마침 저 멀리, 한 사람이 회랑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이는 상태였는데, 걸음걸이가 유독 눈에 익었다.
발을 딱딱 끊어 딛는 걸음. 어깨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걷는 자세.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어야 했다. 청림 백작가에서 데려온 시녀라면, 나와는 접점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저 걸음걸이는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확신은 서지 않았지만,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저 사람을 어디선가 분명히 봤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자꾸 들었다.
다혜와 미란도 나만큼이나 조용해져 있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정원 저편, 회랑의 끝으로 그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