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오해야, 여자친구 그런 거 없어." 도윤이 겨우 짜낸 한마디는 이미 두 사람의 귀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했는데, 서아는 여전히 도윤의 팔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고, 지우는 팔짱을 낀 채로 서아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도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방금까지 떠들썩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대신 숨죽인 시선들이 서서히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놓지 그래." 지우가 짧게 던진 말에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도윤은 놓치지 않았지만, 그것을 붙잡을 새도 없이 서아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내가 왜." 서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고, 그 낮은 목소리 안에는 오랜 시간 눌러왔던 감정이 슬쩍 배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기류를 감지한 반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틀어 이쪽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그 시선들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도윤을 비추는 것 같아 그는 명치가 꽉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도망칠 곳도 없이 교실 한복판에 세워진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소곤거리며 옆자리 친구의 어깨를 툭 치기도 했고, 누군가는 아예 몸을 완전히 돌려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내가 도윤이 여자친구야." 지우가 또박또박 내뱉은 그 한마디는, 사실 우정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텐데도 그 순간의 분위기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교실 전체에 박혀버렸다. 순간 도윤의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 듯했고,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뭐?" 서아의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도윤은 팔을 통해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마치 얇은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처럼 도윤의 신경을 긁고 지나갔다.
"우정이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지우가 뒤늦게 손을 내저으며 정정했지만, 그 말이 나온 순간부터 교실의 웅성거림은 오히려 더 커졌고, 몇몇 남학생이 휴대폰을 들어 이쪽을 슬쩍 촬영하는 것까지 도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촬영본이 오늘 안에 단체 채팅방을 돌아다닐 거라는 확신이 들자, 도윤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 이거 진짜 큰일이네.
서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우를 바라보다가, 결국 도윤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한 걸음이 마치 몇 미터는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윤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나 먼저 갈게." 그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서아가 몸을 돌려 교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도윤은 왠지 붙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지우의 시선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손을 뻗다가 다시 접어 넣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뻔뻔하게 지우 앞에서 서아를 쫓아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서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지우는 그제야 팔짱을 풀고 도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진짜야? 여자친구 있다는 거." 지우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확인을 원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묘하게 집요해서, 도윤은 순간 이게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당연히 아니지, 준혁이가 헛소리한 거야." 도윤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을 때, 지우는 잠시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 나 말고 다른 여자애랑 붙어 다니면 재미없잖아." 그 말이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도윤은 지우의 눈동자 안쪽에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진지함을 놓치지 않았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앉았다.
주변 아이들은 이내 지루해졌다는 듯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갔지만, 몇몇은 여전히 도윤과 지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도윤은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책상 위에 흩어진 필기구를 정리하는 척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에 이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정작 그 대상인 서아는 이미 교실을 떠나버렸고, 남은 건 지우의 알 수 없는 눈빛뿐이었다.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도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운동장 저편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서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등을 잔뜩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 모습이 평소의 서아와는 너무 달라서,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았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몇 배는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작아 보이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도윤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오후 도윤을 기다린 건 서아가 아니라 지우 쪽이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지우가 도윤의 책상 앞에 다시 나타나 짧게 한마디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채 다 싸지도 못한 도윤의 앞에 지우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섰고, 그 표정에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오늘 끝나고 3층 빈 교실로 와. 할 얘기 있어." 그 목소리에는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고, 도윤은 그것이 단순한 확인의 자리가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우는 그 말을 던지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고, 도윤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방끈을 움켜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3층 빈 교실. 그 익숙한 이름이 오늘만큼은 낯설고 서늘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