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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다. 새하얗고, 지나치게 깨끗하고, 병원 특유의 그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 어디야.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끝이 저릿했다. 팔에는 링거 자국이 있었고, 몸 위에는 얇은 환자복이 걸쳐져 있었다.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없었으니까.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 협탁 하나, 그리고 벽에 박힌 스피커 하나. 딱 그게 전부였다. 감옥인가, 병실인가. 둘 다인가. “정신이 드셨습니까.”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심장이 튀어 오르는 줄 알았다. 여자 목소리였고, 기계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AI 같기도 했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네.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저는 누구고요?” “차례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이 시작됐다. “귀하는 다솜국 역사상 세 번째로 확인된 생존 성체 남성입니다.” 스피커 목소리가 그 말을 다시 반복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들었다.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서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목소리는 지치지도 않고 같은 문장을 또박또박 되풀이해 줬다. “이 나라 남성 인구는 현재 열두 명입니다. 그중 아홉은 유아, 두 명은 노인. 성체 남성은 귀하가 유일합니다.” ……열두 명. 대한민국 인구 오천만 시절 감성으로 듣기엔 숫자가 너무 작았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 멸종 위기 동물 개체수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열두 명이요? 그,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백 명도 아니고 열두 명?” “정확한 수치입니다. 재확인해드릴까요?” “……아니요, 됐어요. 믿을게요.” 믿기 싫었지만 믿어야 했다. 목소리의 톤에는 장난기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럼 저는 지금 이 나라에서 유일한, 그, 씨 뿌릴 수 있는 남자란 소리예요?” “……표현이 다소 직설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맞습니다.” 목소리에 미묘한 당황이 섞였다. 나는 그 당황을 못 본 척 넘겼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예의 차릴 정신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어서 브리핑이 계속됐다. 다솜국은 백 년 전 대규모 전염병으로 남성 인구가 급감했고, 그 이후로 남성은 국가 최우선 보호 자원으로 지정됐다고 했다. 남성이 나타나면 인접국들이 전쟁을 걸어온다고 했다. 국내 여성들 사이에서도 남성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져, 과거 두 명의 성체 남성은 그 쟁탈전 끝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목숨을 잃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깐만요. 그 두 명이요. 어떻게 죽었는데요? 자세히 말해주세요.” “……상세 정보는 등급이 낮은 개체에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 있는 세 번째 개체거든요?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스피커가 뭔가 계산하는 것 같은, 미묘하게 늘어지는 침묵. “……두 사례 모두, 쟁탈 과정에서 다수의 세력이 충돌하며 발생한 인명 피해입니다. 개체 본인은 그 충돌의 원인이자 결과였습니다.” 원인이자 결과. 돌려 말했지만 결국 그 소리 아닌가. 서로 뜯어먹으려다가 정작 알맹이는 사라졌다는 소리. 이거 완전 내가 읽던 로판 그대로잖아. 남주가 나타나면 국가가 뒤집히고, 여주들이 목숨 걸고 쟁탈전을 벌이고, 결국 누군가는 죽는다. 나는 그런 소설을 침대에 누워서 새벽 세 시까지 읽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소설 속 남주 자리에 앉아 있다니. 나는 그 서사의 조연으로 죽어나간 두 남자의 뒤를 이을 셋째였다. 됐고, 안 해. 나는 마음을 정했다. 주인공? 남주? 그런 거 안 한다. 사양한다. 절대 사양이다. 나는 이미 전생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조연 인생을 살다 왔는데, 여기서까지 스포트라이트 받다가 칼침 맞을 생각 없었다. “그럼 저 어떻게 해야 이 쟁탈전인지 뭔지에 안 휘말려요?” 대답이 한참 늦게 왔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손에는 땀이 찼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다만?” “귀하께서 스스로 완전한 격리를 원하신다면, 저희 측에서 신원을 철저히 비공개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를 데이터에서 지우는 방식입니다.” 존재 자체를 지운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살아남는 게 목표였고, 주인공이 되는 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로판 남주 자리 따위, 남한테 양보해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저 진짜 아무도 안 만나는 거예요?” “신원 정보는 최상위 등급으로 봉인되며, 외부에는 물론 내부 인사에게도 접근 권한이 극히 제한됩니다. 다만 최소한의 관리 인력과는 접촉이 발생합니다.” “최소한의 관리 인력이요? 그게 몇 명인데요?” “그 부분은 계약 체결 후 안내됩니다.” 뭔가 찜찜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완벽한 조건을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저 그냥 아무도 안 만나고, 이름도 없이, 그냥 없는 사람으로 살게요.” 스피커 너머에서 정적이 흘렀다. 짧지만 확실한 정적. “……확인 결과, 귀하의 요청은 국가 존속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입니다. 상부에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협상은 이상하게 빨리 끝났다. 너무 빨리 끝나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이 세계 관료들은 일 처리가 이렇게 빠른가, 아니면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가. 다음 날, 아니 정확히는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어느 날, 나는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계약서였다. 종이는 두껍고 질감이 좋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종이 질을 따지고 있는 내 자신이 좀 웃겼다. 조항은 간단했다. 나는 국가에 정기적으로 생체 자원을 제공한다. 대신 국가는 나의 신원을 완전히 비공개로 유지하고, 나를 어떤 정치적, 사회적 쟁탈전에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생체 자원, 이라는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는 서명하고 나서야 정확히 알았는데, 그건 나중 얘기고. 조항을 몇 번이나 읽었다. 법률 용어처럼 딱딱한 문장들 사이에서 숨겨진 함정이 있나 찾아봤지만, 내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전생에도 계약서 한 장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인생이었으니까. 계약서 맨 아래, 나는 조건 하나를 손으로 적어 넣었다. “그 대가로 보육원 지원을 요청합니다.” 왜 그런 조건을 붙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전생에 부모 없이 자랐던 기억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뭐라도 좋은 일 하나 남기고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이 열두 명밖에 안 남은 나라에서 아이들 아홉 명이 유아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스피커 목소리는 그 조항을 보고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요청, 받아들이겠습니다.” 목소리가 살짝, 아주 살짝 떨렸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서명이 끝나자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문 너머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 명 들어왔다. 전부 여자였고, 손에는 각종 장비를 들고 있었다. 발소리가 다가올수록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이거 뭐 하는 거지. 채혈이라도 하나. 아니면 검진 같은 건가. 그중 한 명이 나를 보며 말했다. “강하준 씨, 오늘부터 정기 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강하준. 그게 이 세계에서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발음도 익숙하고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이름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정기 시술’이라는 말에서 그들이 꺼내 든 장비를 봤을 때였다. 그건 절대, 그냥 채혈 도구 같은 게 아니었다. 내 눈이 그 장비에 고정된 채로, 머릿속에서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설마. “……저기요, 그거 뭐예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하나같이,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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