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공식 행사요."
스피커 너머로 서지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다음 주 총리님 주관 행사입니다. 강하준 님의 신원은 절대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원격 참석 형태로 진행됩니다."
"원격이면…… 그냥 화면으로 지켜보는 거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특수 제작된 격리 부스 안에서, 강화유리 너머로 참석하시게 됩니다. 목소리는 음성변조기를 통해 전달되고, 얼굴은 반투과 스크린으로 가려집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강하준'이라는 존재가 인터넷 밈으로 치면 딱 '섬네일만 있고 본체는 절대 안 보이는 유튜버' 같은 위치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얼굴 없는 존재, 목소리 없는 존재, 그냥 시스템 상단에 떠 있는 아이디 같은 삶.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노출될 일이 없다는 건, 곧 사고 칠 일도 없다는 뜻이니까.
행사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됐다. 며칠에 걸쳐 관리부에서 보내온 자료를 외웠다. 어느 시점에 어떤 문장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질문에는 침묵으로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짜여 있는 대본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이게 국가 행사인지 방송국 큐시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행사 당일, 나는 부스 안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는 생각보다 좁았다. 딱 한 사람 앉을 만한 의자와 그 앞에 놓인 대형 스크린, 그리고 천장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환풍기 소리가 전부였다. 강화유리 안에 갇혀서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수족관 물고기가 딱 이런 심정이었을 것 같다.
화면 속은 화려한 대회의장이었다. 눈이 즐겁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금박이 번쩍이는 벽면, 붉은 카펫, 정장을 갖춰 입은 수십 명의 여자들이 착석해 있었다. 다솜국 정부 고위직들이 다 모인 자리라고 했다. 돈 지랄 보소, 라는 감상이 절로 들 만큼 조명 하나까지 신경 쓴 인테리어였다.
그 중앙에 앉은 여자가 한미경 총리였다.
짧게 자른 은발, 날카로운 눈매,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도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협상 당시 목소리만 들었던 그 사람이 실제로 화면 안에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목소리로 상상했던 인상과 실제 얼굴이 겹치면서 어딘가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 스쳤다.
"강하준 님의 참석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총리가 카메라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격리 부스 안에서 그 인사를 받는 게 어쩐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구석에서 화면 켜놓고 국가원수한테 인사받는 인생이라니, 이건 무슨 하드모드도 아니고 헬모드도 아니고, 그냥 이상한 모드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방구석 모드' 정도?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는 미리 준비된 답변만 음성변조기로 읽으면 됐다. 대충 '국가에 기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류의 문장들이었다. 대본대로 읽는 내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뭉개져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가는 걸 들으니, 이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이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름은 있는데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 딱 그거였다.
그런데 행사 중반, 나는 화면 한쪽에서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총리 옆자리에 서 있었다. 서류를 챙겨 든 채,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이동하는 그 모습.
순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기억났다. 1화 초반,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떴던 그날, 나를 발견하고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급히 자리를 떠났던 그 정장 여자 관리자였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 붙어서 뭔가를 속삭이는 자세로 서 있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화면 하단에 자막이 떴다.
[남성관리원 총괄관리인 서지은]
뭐지.
서지은이 원래 저렇게 생겼나.
밀색 피부에, 단정하게 넘긴 짧은 머리, 눈매가 유독 곧았다. 목소리로만 상상했던 이미지랑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얼굴을 보니 뭔가 낯설었다. 목소리는 늘 사무적이고 절제되어 있었는데, 화면 속의 지은은 그보다 조금 더 딱딱하고, 조금 더 지쳐 보였다. 서류를 든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지은은 총리 옆에서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딱 한 번, 내 부스 쪽 화면을 스치듯 바라보는 순간이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눈에서 뭔가 이질적인 감정을 읽은 것 같았다.
호기심인지, 경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화면 속 그 눈빛을 몇 번이나 다시 곱씹었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목소리로만 존재하던 사람의 표정을 처음으로 본 탓일까, 아니면 그 눈빛에 담긴 뭔가가 유독 오래 남는 종류였던 탓일까. 알 수 없었다. 그냥 신경이 쓰였다는 사실만 남았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총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회의장에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화면 속에서 우르르 일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방구석에서 강화유리 너머로 이걸 지켜보는 내 처지가 다시금 실감 났다. 나는 그저 화면 속 리모컨 조작에 반응하는 캐릭터 같았다.
스피커를 통해 지은의 목소리가 다시 내 부스로 전달됐다.
"강하준 님, 행사 참여 감사드립니다. 이후 정기 검진을 위해 담당자가 직접 방문할 예정입니다."
"……직접요?"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것 같았는데, 음성변조기가 그걸 다 씹어 먹어서 다행히 티는 안 났을 거다.
"네. 격리 원칙상 최소한의 접촉이지만, 이번 검진은 대면이 필요합니다."
"대면……이라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세부 사항은 방문 전 별도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지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어조. 그런데 이상하게 그 건조함 뒤에 뭔가 다른 게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아마도.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불안감이 스치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세계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음성변조기 뒤에, 강화유리 뒤에, 화면 뒤에 숨어서 존재해왔다.
방구석 유튜버처럼, 섬네일만 존재하고 본체는 절대 노출되지 않는 삶. 그게 나름 편했다. 안전했고, 무엇보다 사고 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벽 중 하나가 곧 사라진다는 예고가 떨어진 것이다.
화면이 꺼지고 부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텅 빈 강화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금 지은의 목소리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떨림을 다시 떠올렸다.
'담당자가 직접 방문한다'는 말과, 화면 너머로 나를 스치듯 바라보던 그 눈빛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