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자가 끝난 시각의 교실은 늘 그렇듯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 몇 개는 이미 꺼져 있어서 앞쪽 칠판 근처만 희미하게 밝았고, 나머지 자리는 어스름한 그늘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 어스름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프린트를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종이 귀퉁이를 맞추고 클립으로 집는 그 단조로운 손짚임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됐다. 창밖으로는 이미 어두워진 운동장이 보였고, 저 멀리 정문 쪽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의 정적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남아 뭔가를 정리하고 있으면, 하루 종일 밀어 넣어뒀던 생각들이 조금씩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런데 그 정적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탁!
교실 뒷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문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오은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곧장 내 자리로 다가와 다짜고짜 책상을 두 손으로 짚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나는 그 순간 하마터면 쥐고 있던 샤프를 놓칠 뻔했다.
"강도현, 너 시간 있어? 아니 없어도 좀 내줘야겠는데."
은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쯤 높았고, 탈색한 금발 끝이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숨이 조금 가쁜 걸 보니 아마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프린트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또 뭔 일이지... 하는 생각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뭔데, 갑자기 이 시간에."
내가 그렇게 묻자, 은서는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렸다. 텅 빈 교실인 걸 알면서도 굳이 확인하듯 좌우를 살피는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웠지만, 나는 웃지 않고 그녀를 기다렸다. 은서는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아예 뒷문까지 가서 슬쩍 닫고 오더니, 다시 내 앞으로 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신재혁 말이야."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덮었지만, 속으로는 뭔가가 걸린 듯한 기분에 손끝이 살짝 저려왔다. 재혁이라는 이름은 늘 그런 식으로 나를 건드렸다. 다른 애들이 무심코 던지는 그 이름 두 글자가, 나에게는 매번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신재혁이 왜."
나는 최대한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목소리에 티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동시에 덮은 책 표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건 내가 긴장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는데, 다행히 은서는 그런 걸 눈치챌 정신도 없어 보였다.
은서는 그제야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그대로 말을 쏟아냈다.
"나 걔 좋아하거든? 계속 좋아했거든? 근데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너한테 도움 좀 청하려고!"
말끝을 늘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있었고, 두 손은 어느새 책상 위에서 꼭 맞잡혀 있었다. 손톱에 칠해진 옅은 핑크색 매니큐어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반짝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겹쳐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 여름, 놀이터 모래바닥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아이가 있었다. 한 명은 흙을 파며 웃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 옆에서 조용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동네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얼굴이, 지금 전교 1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신재혁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나는 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재혁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마른 체구였는데, 웃을 때 왼쪽 볼에 작은 보조개가 생기던 것까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때도 그랬다. 재혁은 뭘 해도 나보다 조금씩 앞서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던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가슴 어딘가에 눌려 있었다. 달리기를 해도, 받아쓰기를 해도, 심지어 모래성을 쌓는 시시한 놀이에서도 재혁의 것이 조금 더 예뻤다. 그런데도 나는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왜였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야, 강도현? 내 말 듣고 있어?"
은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눈앞에서 딱딱 소리를 내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어. 그래서, 뭘 도와달란 건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은서가 재혁에게 다가간다면, 그것도 결국 재혁을 흔드는 일이 될 테고, 재혁을 흔드는 일이라면...
나는 그 생각의 끝을 애써 잘라내며 팔짱을 꼈다.
"연애 상담이라니, 나 그런 거 잘 몰라."
겉으로는 손을 내젓는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이 일에 손을 대야겠다는 결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재혁의 연애 문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위치, 그 자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손끝이 다시 저려오는 걸 느끼며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아이러니인지,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애의 연애를 도와주겠다며 나서는 꼴이라니. 그런데도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 옆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거라면.
"몰라도 돼! 어차피 너랑 재혁이 제일 친하잖아, 초등학교 때부터!"
은서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순간,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초등학교 때부터, 라는 그 말이 유난히 크게 귓속을 울렸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재혁과 나 사이의 이 이상한 거리감은, 아주 오래전 그 여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은서는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만 생각하는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니까 딱이잖아! 걔 성격이 얼마나 까칠한지 알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말도 못 걸겠단 말이야. 근데 네가 옆에서 다리 좀 놔주면, 어? 진짜 딱 좋을 거 같은데!"
은서는 그 말을 하면서 책상을 다시 한 번 탁 짚었다. 열의가 넘치는 그 손짓에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이 상황이 웃을 일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좋아."
나는 결국 그렇게 대답했고, 은서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진짜? 고마워, 강도현! 너 진짜 은인이야!"
그녀가 방방 뛰듯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채 다시 그 여름의 놀이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재혁이 나에게 처음으로 웃어 보였던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웃음이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은서는 신이 나서 가방을 챙기며 뭐라뭐라 계속 떠들었지만, 나는 그 말들이 귓가에서 흩어지는 걸 느끼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일부터 나는 어떤 얼굴로 재혁을 봐야 하는 걸까. 은서의 마음을 전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내 안의 이 감정은 어디에 숨겨야 하는 걸까. 창밖의 가로등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빛의 리듬이, 지금 내 심장이 뛰는 속도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내일 학교에서 다시 얘기하자, 어?"
은서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내가 무슨 약속을 해버린 건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두려움보다는 이상한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것.
나는 프린트 뭉치를 다시 정리하려 했지만, 손끝이 자꾸만 허공에서 멈췄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그 여름의 웃음을 떠올리며, 내일 마주할 재혁의 얼굴을 미리 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