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짝사랑, 내가 이겨줄게

5화

월요일 아침, 나는 은서와 함께 옥상 데이트 계획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평소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등교했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운동장은 뿌연 새벽빛에 잠겨 있었고, 교문을 지나는 학생도 몇 없어 복도는 이상하게 조용했는데, 그 조용함 속에서 은서의 목소리만 유독 크게 울렸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은서는 계속 리허설을 하듯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재혁아, 저기, 있잖아... 아냐, 이건 너무 노골적인가?" 은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젓는가 싶더니, 이번엔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다른 말을 골랐다. "그럼 이건 어때, 재혁아,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이것도 별로야. 너무 무거워."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새로운 대사가 튀어나오고, 그 대사는 채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 폐기되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붙잡았다. "자, 다시 해봐. 자연스럽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시범을 보이듯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자, 은서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어깨를 한 번 털어내듯 흔들더니 나를 향해 대사를 던지듯 말했다. "재혁아, 오늘 옥상 갈래?" "너무 딱딱해." 내가 그렇게 지적하자, 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시도했다. "재혁아~ 옥상 안 갈래에~?" "그건 또 너무 오버야."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은서가 계단 난간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대사를 주고받으며 티키타카를 반복했고, "재혁아, 옥상에서 잠깐만..."이니, "저기 재혁, 시간 있으면..."이니 하는 변주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나는 매번 팔짱을 낀 채 냉정하게 점수를 매겼다. 결국 은서는 웃음을 터뜨리며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아, 나 못하겠어! 강도현, 네가 재혁이라고 생각하고 대사 좀 받아줘봐." "내가?" "어, 그냥 연습이니까!" 은서가 그렇게 조르며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깜빡이는 통에, 나는 마지못해 재혁의 위치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마주 보았다. 계단의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은서의 옆얼굴을 옅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그 낯선 각도에서 은서를 바라보며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재혁아, 나랑... 옥상에서 얘기 좀 할래?" 은서가 그렇게 대사를 던지며 다가서는 순간, 계단의 좁은 폭 때문에 그녀의 발끝이 계단 모서리에 살짝 미끄러졌고, 은서는 그대로 앞으로 휘청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예상보다 훨씬 가까워지면서, 은서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탁! 은서의 손이 내 셔츠 앞섶을 움켜쥔 채로, 우리는 그렇게 몇 초간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은서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지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 냄새와 은서의 샴푸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는데, 나는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뭐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은서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로 빼며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 발이 미끄러져서!" "어, 그래... 괜찮아?"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되물었지만,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서는 괜히 치마 끝을 잡아당기며 시선을 피했고, 나는 그런 은서를 보며 뭔가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 순간, 계단 위쪽 2층 복도 난간에서 무언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는데, 그곳에는 처음 보는 검은 긴머리의 여학생 하나가 우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곧게 늘어진 머리카락, 표정 없이 가라앉은 눈, 교복 재킷의 매무새 하나까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차림새였다. 교복은 분명 한빛고 것이었지만,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 여학생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는데, 발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뇌리에 오래 박히는 걸 느끼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뭐야, 저 애 누구야?" 은서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붙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처음 보는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 여학생의 무표정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우리의 리허설을, 아니 정확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나가던 학생이라면 저렇게 조용히, 저렇게 흔들림 없이 등을 돌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신입생인가? 근데 이 시간에 2층엔 왜..." 은서가 중얼거리며 계단 위쪽을 올려다봤지만, 이미 여학생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우리는 결국 그 이상의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리허설을 이어가려 했으나, 아까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탓에 은서도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그날의 연습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수업 시간에도 그 여학생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국어 선생님이 판서를 하는 동안에도,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에도, 나는 노트 한쪽 구석에 무심코 긴 머리카락 모양을 그리고 있다가 스스로 흠칫 놀라 지우개로 지워버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검은 긴머리, 무표정한 눈빛, 그리고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등을 돌린 그 태도까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었는데, 나는 그 기시감의 정체를 도무지 짚어낼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짝꿍이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라고 물어와도 나는 그냥 "아니, 별거 아니야"라고 얼버무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그 여학생의 무표정한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방과 후, 재혁과 함께 하교하는 길에 나는 은근슬쩍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하늘은 이미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운동장 쪽에서 축구부의 함성이 간간이 들려오는 평범한 오후였다. "오늘 낮에 이상한 애를 봤어. 검은 머리 긴 여자애, 2층 복도에 있던." 그 말에 재혁의 걸음이 순간 아주 살짝 느려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재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지만, 나는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재혁의 시선이 잠깐 정면이 아닌 발끝을 향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보였다. '재혁이, 저 애를 알고 있는 건가.' "누군지 알아? 표정도 없고, 우릴 보자마자 그냥 돌아서던데." 내가 재차 물었지만, 재혁은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재혁이 이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걸음을 재촉하는 통에, 그 질문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목구멍 안에서 조용히 가라앉아 버렸다.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동안, 나는 그의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더 굳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걸 지적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그 검은 긴머리 여학생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앞에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이, 어쩌면 오늘 처음 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확신이, 아주 희미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스며 나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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