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짝사랑, 내가 이겨줄게

2화

['모래 놀이터, 여름, 여덟 살.' 그 계절의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혼자 놀이터 구석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한창 기울던 시기였고, 어머니는 매일 늦게 들어오셨으며, 나는 학원 하나 다니지 못한 채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게 여름방학의 전부였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서, 나는 모래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개미굴을 무너뜨리거나,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낙서를 하거나, 그것도 지겨워지면 그늘에 누워 매미 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다. 그날은 유난히 무더웠고,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늘 밑 벤치에 낯선 남자아이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하얀 셔츠에 반듯하게 다림질된 반바지,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짙은 갈색 머리, 그 아이는 마치 광고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얼굴로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이 더위에 저런 옷차림이라니, 게다가 저렇게 꼿꼿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애가 이 동네에 있었나. '뭐야, 저 애.' 나는 흙 묻은 손을 반바지에 슥슥 닦으며 그 아이 쪽으로 다가갔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래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아이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 나이대 아이들 눈이 보통 그렇게 깊이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재혁의 눈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뭐 읽어?" 내가 그렇게 묻자, 그 아이는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책 표지를 슬쩍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과학 잡지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읽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어른들도 잘 안 보는 그런 잡지. 표지에는 온통 별과 은하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나는 글자보다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자리에 대한 거야." 그 아이가 담담하게 대답했고, 나는 순간 흥미가 확 일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벤치는 그늘 덕분인지 생각보다 시원했다. "나도 별 좋아하는데." 사실은 잘 몰랐지만, 괜히 아는 척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했고, 아이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꽤 오래 이어져서, 나는 순간 거짓말이 들킨 건가 싶어 괜히 딴 곳을 보려던 참이었는데, 아이가 아주 살짝, 정말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신재혁의 첫 웃음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 웃음이 얼마나 낯설고, 동시에 얼마나 눈부셨는지. 여름 한낮의 그늘 아래서, 그 웃음 하나가 그렇게 오래 남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이름이 뭐야?" 내가 묻자, 아이는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신재혁." "나는 강도현." 우리는 그렇게 이름을 주고받았고, 그날 오후 나는 처음으로 놀이터가 아니라 재혁의 옆자리, 그 그늘 밑 벤치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소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재혁은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었다. 백조자리는 이렇게 생겼고, 여름철 삼각형은 이 세 별을 이어서 만든 거고, 데네브는 사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밝게 보이는 거라고, 재혁은 손가락으로 하늘도 아닌 잡지 페이지를 짚어가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걸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걸 계산하고 있었다. '이 애, 뭔가 다르다.' 학교 선생님도, 학원 선생님도 아닌 또래 아이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혁은 뭘 물어도 척척 답을 냈고, 나는 그 옆에서 계속 뭔가에 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까지 우리는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저녁 바람이 슬슬 불어올 즈음에야, 나는 엉덩이가 배기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내가 묻자, 재혁은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끄덕임이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그 벤치에서 만났다. 나는 매번 흙투성이 손으로 나타났고, 재혁은 늘 정갈한 차림으로 먼저 와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별자리, 어느 날은 곤충, 어느 날은 이름도 모르는 화학 원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중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옆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재혁에게 처음으로 이겨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고, 그 오기의 대상이 다름 아닌 딱지치기였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다. 나는 매일 딱지를 접었다. 신문지를 주워다가 두껍게, 더 두껍게 접으면서, 이번엔 반드시 이길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재혁은 그런 나를 보며 늘 담담한 얼굴로 딱지를 접었다. 그의 손은 나보다 훨씬 야무졌고, 딱지 모서리도 훨씬 반듯했다. 승부는 매번 순식간에 끝났다. 탁, 탁, 소리가 나고 나면 내 딱지는 뒤집혀 있었고, 재혁의 것은 늘 그 자리 그대로였다. 결국 시합에서 진 건 나였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 "다음엔 내가 이길 거야." 지고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고, 재혁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처음으로 조금 긴 문장을 말했다. "그래, 다음에도 해보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재혁이 나에게 건넨 첫 번째 관심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기만 한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다음'을 약속한 것.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 만났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였으니 마주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우연들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던 것 같다. 4학년, 5학년, 6학년, 그리고 중학교까지, 반이 갈릴 때마다 나는 은근히 조바심을 냈고,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는 대체로 같은 반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중학교, 그리고 지금의 한빛고등학교까지 이어져왔다는 게, 나는 여전히 신기하면서도 답답했다. 신기한 건, 그 오랜 시간 동안 재혁이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 여전히 뭘 물어도 정확한 답, 여전히 쉽게 웃지 않는 얼굴. 답답한 건, 나 역시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한 게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늘 재혁의 다음 자리, 정확히 한 칸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었고, 그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여름 오후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옆자리 하나를 채 다 차지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가끔 궁금했다. 재혁은 그 여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흙 묻은 손으로 다가와 "나도 별 좋아하는데" 하고 아는 척했던 그 여덟 살짜리 꼬맹이를, 지금도 떠올리는 순간이 있을까. 물어본 적은 없었다. 물어봤다가 "글쎄" 한마디로 끝나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한 번도 묻지 못했다. 이번 은서의 부탁이, 그 거리를 좁힐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벌려놓는 계기가 될까.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벤치 위의 여름이 끝난 뒤로 단 한 번도, 나는 신재혁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편하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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