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짝사랑, 내가 이겨줄게

4화

은서의 작전은 그 주말부터 본격적으로 판이 커졌다. 문제는 은서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녀의 친구 그룹, 이른바 '한빛고 여신 라인'이라 불리는 다섯 명이 통째로 이 작전에 끌려들어왔다는 점이었는데, 토요일 오후 학교 앞 카페에 도착한 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섯 쌍의 시선이 나를 스캔하듯 훑고 지나가는 걸 느끼며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창가 쪽 가장 넓은 테이블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다섯 명이, 마치 면접장에 앉은 심사위원단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 놓인 다이어리며 펜이며 심지어 누군가는 노트북까지 펴놓은 걸 보며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작전회의야, 청문회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은서 옆자리에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네가 걔야? 재혁이랑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는?" 무리 중 가장 활발한 성격의 지윤이가 턱을 괴며 나를 빤히 쳐다보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의 눈빛이 마치 신입생 뒷조사라도 하는 듯 위아래로 나를 훑고 지나갔는데, 그 시선이 어깨에서 얼굴로, 다시 얼굴에서 손끝으로 옮겨갈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우리 은서 좀 도와준다고?" 이번엔 조금 새된 목소리의 채영이 팔짱을 끼며 물었고, 나는 그 압박감 속에서 애써 태연한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 타이밍에 사레가 들려서 콜록, 하고 기침이 터져 나오자 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아, 이건 좀... 첫인상부터 망했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를 닦는데, 옆에서 하윤이라는 애가 피식 웃는 게 보였다. "돕는다기보다는, 뭐, 조언 정도."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은서가 다짜고짜 내 등을 팡 치며 끼어들었다. "아냐, 얘 완전 도와주기로 했어! 오늘부터 우리 다섯이 뭉쳐서 작전회의 하는 거야!" 그 말에 다섯 명의 눈이 동시에 반짝이는 걸 보며, 나는 이미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등짝이 얼얼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이미 나를 '작전 참모'로 확정 지은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작전회의라는 게 별거 아니었다. 재혁의 스케줄, 좋아하는 음식, 자주 가는 장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혁이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정보 수집이 그날의 주제였는데, 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며 정보를 제공했고, 여자애들은 그걸 마치 국가 기밀이라도 되는 양 노트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재혁이 매운 거 잘 못 먹어. 근데 티 안 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채영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헐, 진짜? 지난번에 급식에서 매운 떡볶이 나왔을 때 아무 말 없이 다 먹던데?" "그거 억지로 먹은 거야. 표정 하나도 안 변해서 다들 모르지." 내가 그렇게 덧붙이자, 다섯 명이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진짜 오래된 친구는 다르구나..." 지윤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나는 묘한 자부심과 동시에 이상한 씁쓸함을 함께 느꼈다. 오래된 친구, 라는 말이 정확히 나를 겨냥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나를 재혁의 그늘 밑에 가둬두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애써 티내지 않고 계속 정보를 풀어놓았다. 소미라는 애가 볼펜을 딸깍거리며 "그럼 재혁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뭐야?"라고 물어왔을 때, 나는 잠시 말을 고르며 창밖을 바라봤다.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니.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는 거였는데, 어릴 때부터 봐온 재혁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티를 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음... 재혁이 조용한 걸 좋아해. 시끄러운 곳보단 도서관이나 옥상 같은 데를 좋아하고."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데, 갑자기 은서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오, 그럼 옥상 데이트!" 그 말에 나머지 넷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는 그 열기에 밀려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채영이 노트에 "옥상! 도서관! 조용한 곳!"이라고 크게 적으며 별표를 세 개나 그리는 걸 보며, 나는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스쳤지만, 이미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근데 옥상은 못 올라가잖아, 학교에서 막아놨는데." 하윤이 현실적인 문제를 짚자, 다섯 명의 얼굴에 동시에 그늘이 졌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관리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열쇠 정도는..." 하고 슬쩍 말을 꺼냈는데, 그 한 마디에 다섯 명의 눈이 다시 번쩍 뜨이는 걸 보며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이러다 진짜 옥상 로맨스 작전까지 짜는 거 아닌지. 그날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 무리의 '작전 참모'가 되었다. 은서는 물론이고 지윤, 채영, 그리고 나머지 두 명, 하윤과 소미까지도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여자애들 무리 속에 섞이는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나누는 잡담과 농담이 꽤 즐겁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를 나와 각자 집으로 흩어지기 전, 소미가 나를 붙잡고 "너 SNS 있어? 우리 단톡방 만들 건데 초대할게" 하고 말했을 때, 나는 얼떨결에 아이디를 알려주고 말았다. 그날 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재혁이 작전본부'라는 이름의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져 있었고, 다섯 명의 프로필 사진과 이모티콘이 쉴 새 없이 올라오는 걸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특수부대 작전명 같은 건데... "강도현, 너 진짜 요리 잘한다며? 다음엔 우리도 좀 해줘라." 하윤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나는 팔짱을 끼고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조건이 있어." "뭔데?" "작전 성공하면." 그 말에 다섯 명이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각오를 다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채영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야, 근데 만약 재혁이 은서 말고 다른 애 좋아하면 어떡하지?" 하고 폭탄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카페 안 공기가 잠깐 얼어붙는 걸 느꼈다. 은서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며, 지윤이 재빨리 채영의 팔을 툭 치며 "야, 그런 말을 왜 지금 해!" 하고 눈치를 줬고, 나는 그 어색한 침묵을 깨보려고 "그럴 일 없어, 재혁이 요즘 딱히 누구한테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고" 하고 말을 얹었는데, 그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조금 어색하게 들렸다. 딱히 누구한테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고... 정말 그런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편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이 작전을 도우면서 재혁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다시 꺼내들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어릴 적 그 벤치에서 느꼈던, 재혁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카페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져가는 걸 바라보며, 나는 다섯 명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처럼 흘려들었다. 은서가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 채영이 장난스럽게 태클을 거는 목소리, 지윤이 중간에서 정리하듯 끼어드는 목소리, 그 모든 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재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어린 나. 그 기억이 왜 지금 이 순간에 겹쳐오는 건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지만 답을 찾을 자신이 없었다. 은서를 돕는 일이, 어쩌면 나 자신의 오래된 감정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나를 사로잡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휴대폰을 꺼내 단체 채팅방을 열어보았다. 이미 백 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고, 그 맨 위에는 은서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었다. 재혁과 내가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는데,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사진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재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 한쪽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이 작전이 정말 은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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