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황도의 밤은 유리로 지어진 것처럼 투명하고 차가웠다.
공작저의 대연회장에는 수백 개의 크리스탈이 매달린 샹들리에가 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오갈 데 없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향수 냄새와 뒤섞여 떠돌았다. 백합과 사향이 뒤섞인 그 냄새는 이서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맡아온 냄새였는데, 오늘만큼은 그 익숙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이서윤은 그 화려한 공기 속에서도 등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었는데,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주 전 시녀들과 함께 몇 번이나 옷감을 만지고 색을 바꿔가며 골라둔 은백색 드레스였다. 은실로 짠 자수가 촛불에 닿을 때마다 잔물결처럼 반짝였고, 목덜미에 닿는 레이스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이 옷을 입으려고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지.' 서윤은 그 생각을 하며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오늘은 강도윤과의 혼약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자리였다. 몇 달 전 두 사람이 처음 마주했던 정원에서의 짧은 대화, 그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던 모습, 딱딱하지만 무례하지 않았던 말투까지, 서윤은 그 기억들을 오늘을 위해 몇 번이나 곱씹어왔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사람이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그녀는 속으로 되뇌며 부채를 살짝 접었다 펼쳤다. 부채의 뼈대가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시녀 하나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귀띔했지만 서윤은 그저 옅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악단의 연주가 잠시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강도윤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의 팔에 걸린 것은 이서윤의 손이 아니었다.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고, 백서린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낮게 오르내리는 것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백서린. 서윤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남부 어느 남작가의 서녀로,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화려한 언변과 대담함으로 벌써 몇 번이나 입방아에 오른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강도윤의 팔에 걸려 있는지, 서윤은 짧은 순간 안에 수십 가지 추측을 떠올렸다가 곧 모두 지워버렸다. 지금은 이유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잔이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도윤은 서윤 앞에 멈춰 서더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이서윤 양."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연회장 전체에 퍼질 만큼 또렷했다. 서윤은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 어디에도 미안함이나 흔들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대사를 그대로 읊는 배우처럼, 그의 눈빛은 서윤이 아니라 서윤의 등 뒤 어딘가를 향해 있는 듯했다.
"나는 이 혼약을 더 이어갈 수 없겠소."
짧은 그 한마디가 서윤의 귓가에 닿기까지, 서윤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문장의 뜻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던져진 말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몸에 스며들지 않았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는데도 서윤의 세계는 이상하게 고요했다. 마치 유리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가, 그마저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서린이 그의 팔을 더 세게 감싸 안으며 서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에는 동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오히려 승리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스며 있었는데, 서윤은 그 표정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백서린의 눈동자는 마치 무대 위에서 관객의 반응을 즐기는 배우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왜 웃지.' 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그런 생각조차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연회장의 수많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귀부인들의 부채 뒤로 숨죽인 속삭임이 들려왔고, 젊은 귀족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낮게 탄식했고, 또 누군가는 손끝으로 입을 가리며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서윤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부인 하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 시선 회피가 오히려 서윤의 가슴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서윤은 그 모든 시선의 무게가 한꺼번에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는데,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지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으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부채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오히려 그녀를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아프다. 그러니까 아직 서 있는 거야.' 그런 이상한 논리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강도윤은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치 이미 준비된 대본을 읽은 사람처럼, 그는 백서린과 함께 등을 돌려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어깨선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서윤은 그 넓은 등을 바라보며, 몇 달간 나눈 짧은 대화들, 정원에서의 인사, 편지에 담긴 정중한 문장들이 전부 허상이었는지를 헤아려보려 했지만 이내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지금 그런 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악단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사람들은 어색하게 다시 대화를 이어갔지만, 서윤을 향한 시선만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았다. 몇몇은 대놓고 이쪽을 흘긋거렸고, 몇몇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 어느 쪽도 서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서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머릿속은 텅 빈 채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는데, 마치 자신이 딛고 선 자리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무언가를 위로하듯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술의 움직임만 보였을 뿐, 무슨 말인지 조합되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그 생각만이 유일하게 선명했다. 서윤은 천천히 부채를 접고, 고개를 살짝 들어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이도현의 굳은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분노와 걱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지만, 서윤은 그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도리어 더 반듯하게 등을 세웠다. 아버지가 이 혼약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는지, 서윤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공작가와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에 대한 것인지 서윤은 순간 헷갈렸다. '그런 걸 지금 따질 때인가.' 스스로를 향한 자조가 목 끝에 걸렸다.
연회장의 시계가 밤 열한 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 종소리가 마치 그녀의 삶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들렸는데, 서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울어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저 손끝만 차갑게 식어갔다. 오히려 눈물이 나지 않는 그 사실이 서윤 자신을 더 낯설게 만들었다. '나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었나.'
연회장의 화려한 빛 아래에서, 그녀는 홀로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이 그녀의 은백색 드레스 위로 부서져 내렸고, 그 반짝임이 마치 그녀를 향한 마지막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 저편에서 낮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서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 웃음의 주인은 이미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누구였을까. 서윤은 그 짧은 웃음소리의 잔향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오늘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