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명 앞에서 파혼당했다

5화

청하 영지행이 결정된 이후, 저택은 며칠간 조용한 움직임으로 채워졌다. 짐을 꾸리는 하인들의 발소리와 마차를 손보는 소리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그 소리들은 마치 저택 전체가 무언가를 준비하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서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문득 자신이 이 모든 준비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방 안에 앉아 서윤은 몇 통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미 몇 번이나 읽었던 것들이었지만, 손에 닿는 종이의 결이 새삼스러웠다. 윤채영의 편지에는 걱정과 함께 조심스러운 위로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몸조심하렴, 그곳의 겨울은 이곳보다 훨씬 길다고 들었어.' 그 한 줄을 읽으며 서윤은 손끝으로 종이의 가장자리를 매만졌다. 한지민의 편지에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강도윤을 향한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문장 곳곳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읽는 것을 보는 사람마저 지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인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윤은 그 대목에서 짧게 웃음이 났다가도, 곧 그 웃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어 표정을 지웠다. 조현우의 편지는 짧았다. 몇 문장이 전부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어디에 있든, 잘 지내길.' 그 짧은 문장을 서윤은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 편지들에 답장을 쓸 여력이 아직은 없구나.' 서윤은 편지들을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었고, 서랍이 닫히는 짧은 소리와 함께 그것이 마치 황도에서의 삶 전체를 서랍 속에 밀어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열어볼 날이 있을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짐을 꾸리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옷가지와 장신구, 어릴 적 아끼던 몇 권의 책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오래된 로켓 목걸이까지.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겨두어야 할지 결정하는 일 자체가 서윤에게는 지난 며칠간의 삶을 정리하는 것과 같았다. 책 한 권을 손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표지가 낡아 손끝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는데,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걸 가져가면 무겁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으로 감정을 눅이려 했지만, 손은 결국 그 책을 짐 상자 안에 넣고 있었다. 수석 메이드는 서윤의 짐을 함께 정리하며,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챙겨 넣었는데, 그 손길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옷을 접는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고, 상자 모서리에 옷깃이 걸리지 않도록 몇 번이나 매만지는 모습을 서윤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가씨는 이곳에 남아주세요." 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청하로 향하는 길은 멀고 낯선 곳이었으며, 나이 든 수석 메이드가 그 길을 함께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서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석 메이드는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슬쩍 닦았는데, 그 짧은 동작 속에 담긴 서운함과 안도가 뒤섞여 있는 듯했다. "저 대신, 최 집사님께서 아가씨를 잘 돌봐드릴 겁니다." 그 말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노식은 이미 이도현으로부터 청하 영지 동행에 대한 지시를 받은 상태였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최노식은 그 지시를 받은 날, 평소보다 더 일찍 저택 안팎을 살피며 채비를 서둘렀다고 했다. 출발 전날 밤, 최노식은 서윤의 방문 앞에 서서 나지막이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서윤이 문을 열자, 최노식은 낡은 가죽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 표면에는 오래 사용한 흔적이 배어 있었고, 손잡이 부분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그 안에는 서윤이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책 몇 권과, 오래전 유모가 짜준 작은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오래된 것들이라 부끄럽습니다만, 그곳에서 밤이 길고 추울 것이니 도움이 될까 하여." 서윤은 그 상자를 받아 들며, 목이 조금 메어오는 것을 느꼈으나, 눈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목도리를 손끝으로 쓸어보니 오래된 실의 거친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감촉 하나가 지난 세월을 통째로 불러오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것 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최노식은 그런 서윤의 표정을 눈치채고도 굳이 말을 더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음 날 아침, 저택 앞마당에는 마차 두 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이도현은 딸을 배웅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있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마당에 깔린 자갈 위로 하얀 입김이 짧게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청하에 도착하면 곧바로 서신을 보내라." 이도현이 말했고,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손을 잠시 잡았다. 그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그 차가움 속에서 서윤은 아버지 역시 이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놓기 직전, 이도현의 손끝이 아주 잠깐 서윤의 손을 더 세게 쥐었던 것 같기도 했으나, 그것이 정말 그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인들이 줄지어 서서 배웅했고,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는데, 서윤은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짧게 눈을 맞추며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해온 이들이었고, 그들의 눈빛 속에는 저마다 다른 걱정과 아쉬움이 담겨 있는 듯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서윤은 저택의 정문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그 문 너머로 익숙한 지붕과 정원의 나무들이 보였고, 그 풍경이 마치 오래된 그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겨울 아침의 햇살이 지붕 위에 낮게 걸려 있었고, 그 빛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서윤은 마차에 올랐다. 최노식이 뒤따라 오르며 마차 문을 닫았고, 곧이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은 좁고 어두웠으며, 낡은 가죽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서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저택을 벗어나 대문을 지나는 순간, 서윤은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하인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수석 메이드의 흐느끼는 모습도, 몇몇 하인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도 하나하나 눈에 새겨두려는 듯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바퀴 소리는 계속되었고, 창밖의 풍경은 익숙한 거리에서 낯선 벌판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서윤은 무릎 위에 놓인 가죽 상자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앞으로 얼마나 먼 길이 남았는지,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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