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붉은 융단이 발밑에서 자꾸만 물결치듯 흔들리는 것 같았고, 등 뒤로는 아직도 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누군가는 혀를 차고, 누군가는 낮게 웃음을 삼켰을 것이다. 서윤은 그 소리를 하나하나 구분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귀는 제멋대로 그 웅성거림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골라내고 있었다.
시녀가 팔을 내밀며 부축하려 했을 때, 서윤은 정중히 그 손을 밀어내며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발끝에 온 신경을 모아야 했는데,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았다. 등 뒤로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고, 그 시선들이 마치 차가운 손끝처럼 목덜미를 스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서윤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지만, 정작 몸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그 땀은 차갑다 못해 오싹했다.
복도의 촛대들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서윤은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다시 짧게 흔들리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 그림자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런 유치한 상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림자 타령이라니.' 서윤은 입술을 안쪽으로 살짝 깨물며 그 웃음을 삼켰다.
마차에 오르기 전, 서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흐린 밤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달빛조차 제대로 새어 나오지 못했고, 저택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찬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그 하늘이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속 같다고 생각했다가, 곧 그런 감상에 젖는 것조차 사치라는 자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하늘 보면서 감상에 잠기는 건 소설 속 여주인공이나 하는 짓이지.' 서윤은 마차의 발판에 발을 올리며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냈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고, 그 소리와 함께 서윤은 참았던 숨을 조금씩 내뱉었다. 마차 안은 어두웠고, 좁은 공간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적어도 이 안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얼굴을 살피지 않을 것이었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서윤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황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저택들, 늦은 밤까지 켜진 상점의 불빛,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불빛들 속의 한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는데, 지금은 그 믿음이 완전히 부서져버린 것 같았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고,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가 돌바닥의 틈을 지날 때마다 몸이 작게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조차 지금은 버겁게 느껴졌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서윤은 한동안 바라보았다. 화장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고, 머리에 꽂힌 장식도 그대로였다. 마치 연극이 끝난 뒤에도 무대 위 세트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어딘가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분장은 그대로인데 극은 끝났구나.' 서윤은 그 생각을 하며 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을까.' 서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무너지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확실했다. 그것이 자존심 때문인지, 혹은 두려움 때문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눈물 한 방울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진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그저 나쁜 꿈이라고, 조금 있으면 깨어날 악몽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을 때, 서윤은 잠시 손잡이 위에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너머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러나 오늘만큼은 낯설게 느껴질 눈빛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서윤은 문을 밀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하인들이 조용히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동정과 궁금함이 섞여 있었는데, 서윤은 그 눈빛들을 마주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인 하나가 급히 등불을 들어 그녀의 발치를 밝혀주었고, 또 다른 하인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든 반응들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노식이 문 앞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노집사의 얼굴에는 깊은 우려가 스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손에는 늘 그렇듯 미리 준비해둔 담요가 들려 있었는데, 서윤이 사양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저었음에도 최노식은 굳이 그것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담요에서는 옅은 나무 향이 났다. 오래된 장롱에서 막 꺼낸 듯한, 그 익숙한 냄새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조금 눅여주는 것 같았다.
"아가씨." 최노식이 낮게 불렀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서윤은 짐작했지만, 노집사는 끝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서윤에게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물어도, 무엇을 위로해도 지금의 서윤에게는 버거웠을 것이기에.
서윤은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등 뒤로 하인들의 낮은 속삭임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발소리가 계단 끝에 닿기도 전에 이미 그 속삭임은 저택의 복도를 타고 번지고 있었다. '벌써 시작됐구나.'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소문은 이미 저택의 벽을 타고 스며들기 시작한 것 같았고, 이 밤이 지나기 전에 온 저택이, 나아가 황도 전체가 오늘의 일을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서윤은 이상하게도 그 무게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저택의 홀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고, 그 그림자 속에 서윤 자신의 모습도 겹쳐 있었다. 마치 화려한 세트장 위에 홀로 남겨진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은 모두 떠났는데, 조명만 여전히 켜져 있는.
방문을 닫고 홀로 남았을 때에야 서윤은 비로소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나 눈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끝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고, 온몸이 마치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손톱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손바닥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목에 걸려 있던 장신구를 풀어내는데도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결국 서윤은 그것을 그냥 목에 걸어둔 채로 두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창밖으로 흐린 밤하늘이 여전히 별 하나 없이 캄캄했다. 서윤은 그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마치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둠 저편, 저택의 대문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조용히 멈춰 서 있다는 것을, 방 안의 서윤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