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명 앞에서 파혼당했다

3화

파혼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지만, 이서윤은 눈을 뜨고도 한참을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세고 있었는데, 그 무늬가 몇 개인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있는 숫자였음에도 오늘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나뭇결 무늬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보듯 시선으로 따라가다가, 서윤은 문득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숫자를 세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파혼당한 다음 날 아침에 천장 무늬를 세고 있는 여자라니.' 그 생각이 스치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음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어 그저 입술만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창밖에서는 하인들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들려왔고, 그 조심스러움 자체가 벌써 어떤 소식이 저택 전체에 퍼졌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발소리는 유난히 짧게, 마치 소리를 죽이려는 듯 끊어졌다가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 정원의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서윤은 몸을 일으켜 세면대 앞에 앉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는데, 눈가는 붉지도 않았고 얼굴색도 크게 상하지 않아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밤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신조차 믿기지 않아서 손끝으로 눈가를 눌러보기까지 했으나 물기는 없었다.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이렇게 태연히 앉아 있다니.'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문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젯밤에 강씨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냈다던데, 사과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지?" "그러게 말이야, 아가씨가 얼마나 참담하실지……." 서윤은 그 목소리들이 자신의 시녀들 중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으나, 굳이 문을 열어 확인하지는 않았고, 그저 빗을 들어 머리를 정돈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빗살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두피에 닿는 감촉이 평소보다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계절 탓인지 마음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바람보다 빠르게 저택의 담을 넘고 하인들의 입을 타고 부엌까지, 그리고 다시 마당까지 돌아 나오는 것이었으며, 이씨 공작가의 하인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촘촘한 네트워크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 정도 소식이라면 오늘 안으로 황도 전체가 알게 될 것이었다. '내일쯤이면 사교계 모임에서마저 이 얘기가 나오겠지.' 서윤은 그 생각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눈을 응시했다.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감정의 파도가 잔잔했는데, 어쩌면 어젯밤 이미 모든 눈물을 쏟아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서윤이 방문을 열고 나섰을 때, 복도에 서 있던 두 명의 하녀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는데, 그 놀람에는 미안함과 동정,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는 듯 보였다. 한 명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고, 다른 한 명은 서윤의 얼굴을 살피듯 흘끔거리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서윤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하녀들은 오히려 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고,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윤의 마음은 이상하게 잔잔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정해진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리기까지 했다. '다들 내가 울면서 방에서 나올 줄 알았나 보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서윤은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지나쳤는데, 그 초상화 속 조상들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아침만큼은 모든 사물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마주친 수석 메이드는 서윤의 어린 시절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윤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고, 그 짧은 접촉 속에 담긴 온기가 오히려 서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손등에 남은 온기가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아서, 서윤은 몇 번이나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까.'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서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고, 하늘 역시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색이었는데, 그 변함없음이 오히려 서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나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식탁에는 아버지 이도현이 이미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신문을 읽고 있었으나, 그 신문을 넘기는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는 것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손끝뿐 아니라 신문을 쥔 손 전체가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었고, 종이가 구겨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잘 잤느냐." 이도현이 짧게 물었고, 그 물음 속에는 딸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으나, 서윤은 그 마음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은 채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식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은수저가 접시에 닿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고, 그 침묵 속에서 서윤은 오히려 자신이 이 침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불편했다. 수프를 뜨는 숟가락의 움직임마저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음식인지 침묵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도현은 딸을 살피듯 몇 번이나 시선을 들었으나, 그때마다 서윤은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 어긋남조차 두 사람 각자에게는 다른 의미로 읽혔을 것이다. 이도현은 딸이 자신의 시선을 피한다고 여겼고, 서윤은 그저 접시 위의 음식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집사장 최노식이 들어와 나지막이 고했다. "아가씨께 편지가 여러 통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이도현의 시선이 잠시 딸에게 향했으나, 서윤은 태연히 받아 들며 봉투들을 훑어보았고, 그중 몇몇은 윤채영과 한지민, 조현우의 필체였는데, 그들의 걱정 어린 안부가 벌써 종이 위에 스며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봉투마다 다른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어떤 것은 급하게 흘려 쓴 듯 글자가 삐뚤어져 있었고, 어떤 것은 신중하게 눌러 쓴 듯 정갈했다. '다들 벌써 알고 있구나.' 서윤은 편지를 곧바로 열어보지 않고 옷소매 안쪽에 밀어 넣었는데,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마치 자신의 감정을 잠시 유예해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편지를 읽는다면 친구들의 걱정 어린 문장들 앞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기에, 차라리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나았다. 식당을 나서던 서윤의 등 뒤로, 부엌 쪽에서 또 다른 수군거림이 들려왔으나, 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등을 곧게 세운 채 복도를 걸어갔는데, 그 곧은 등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처럼 느껴졌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지만, 서윤은 걸음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이도현은 그런 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딸이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서윤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침착함이 이도현에게는 더 깊은 불안으로 다가왔다. 신문을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고, 그는 딸의 걸음걸이 하나, 손짓 하나까지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는데.' 그 생각이 이도현의 가슴 한켠에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는 딸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신문을 다시 펼쳤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도현의 시선은 신문 위를 배회하다가 결국 창밖으로 향했다. 정원 저편, 딸이 어릴 적 뛰어놀던 자리에 눈길이 머물렀고, 그는 문득 지난밤 강씨 공작가에서 도착했다던 그 짧고 무례한 전언을 떠올렸다. '사과 한마디도 없이 그렇게 끝내겠다는 건가.' 분노인지 걱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고, 이도현은 신문을 접어 식탁 위에 내려놓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