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골목 안쪽 벽에 강서연이 등을 붙인 채 서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벤치에 앉아 식은 도시락을 반쯤 남긴 채로 자리를 떴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매점에서 파는 음료수 하나가 갑자기 마시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 사소한 갈증이 나를 이 골목으로 이끌었다는 걸,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건물 뒤편, 잘 알려지지 않은 지름길이었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바닥에는 낙엽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나는 늘 그 길로 매점까지 지름길을 다녔다. 오늘도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그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정우진이었다.
아침에 봤던 여유로운 웃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표정이 들어차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일그러진 입매, 짓눌린 짐승 같은 눈빛. 나는 순간 발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사람이, 정우진이라고? 아침 조회 시간에 반장으로서 발표를 하며 여유롭게 웃던, 선생님들에게도 인기 좋은 그 정우진이 맞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안 되는데."
정우진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분명한 위협이 섞여 있었다. 강서연은 벽에 등을 붙인 채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두려움보다는 혐오가 더 짙게 실린 표정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옆얼굴을 처음 제대로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학년이지만 다른 반이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저 복도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 사람.
"싫다고 했잖아."
짧고 단정한 대답이었다. 그 단호함이 오히려 정우진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그녀의 팔뚝을 파고드는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강서연이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싫은데. 나 뭐가 부족한데."
그의 목소리에는 애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그 확신이 짓밟혔을 때 터지는 히스테리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골목 어귀에 서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온갖 계산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뒤섞였다.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정우진은 학교에서 나름 이름값이 있는 애였다. 선생님들에게 신망도 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 애를 상대로 시비를 건다는 건, 앞으로 남은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아질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굳이 눈에 띄지 않는 걸 좋아했다. 조용히 지내다가 조용히 졸업하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끼어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아니, 답은 있었지만 그 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저 팔을 붙잡힌 여자애가,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강서연의 눈이 순간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는 도움을 청하는 절박함이 스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이 내 머릿속에 있던 온갖 계산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나는 그 순간 더 이상 계산할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서 뭐 해."
내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크고 또렷한 소리였다. 정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낯선 얼굴에 대한 짧은 당혹, 그다음엔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넌 뭔데."
"같은 반."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사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저 목소리만은 무너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을 뿐이었다. 정우진은 나를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에서, 그가 나를 전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꺼져. 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가 다시 강서연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팔을 더 세게 붙잡는 게 보였다. 강서연이 얕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내 등을 밀었다.
나는 그 순간 골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손끝은 이미 차갑게 얼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만약 이 상황이 잘못 흘러가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맞을 수도 있었다.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정우진의 친구들이 뒤에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놔."
짧게 말했다.
정우진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 짜증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강서연의 팔에서 떨어지는 대신, 이번에는 내 쪽으로 뻗어 왔다.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거칠었다. 손가락이 셔츠 위로 어깨뼈를 짓누르는 감각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 새끼가."
그가 나를 벽으로 밀치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두 사람의 몸이 얽히며 잠시 균형이 무너졌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 발을 뒤로 짚었고, 그 순간 정우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겨우 몇 센티미터 차이로 내 얼굴을 비껴갔다. 그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감각에, 나는 뒤늦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저 주먹이 몇 센티만 더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야, 진짜 죽고 싶냐."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위협적인 톤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오히려 다른 걸 읽어냈다. 자신이 방금 저지른 짓에 대한 당혹감. 여기서 더 나가면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는다는 걸,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손을 들어 올린 채로 멈춰 있는 그의 자세에서, 그 망설임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와중에도, 어디선가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나는 스스로도 이게 통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진우 선생님이 이쪽으로 오고 계세요."
거짓말이었다.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갖는 무게를 나는 알고 있었다. 생활지도부장, 학생들 사이에서 저승사자로 불리는 그 이름. 지난 학기에 담배를 피우다 걸린 3학년 선배가 정학을 받았다는 소문, 지각 세 번에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는 소문, 그 모든 소문의 중심에 있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 하나로 정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혼란, 그다음엔 의심, 그리고 두려움.
"뭐, 뭐라고?"
"방금 후문 쪽에서 봤어요. 이쪽으로 오시는 것 같던데."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이를 악물어야 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정우진은 나와 강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믿을지 말지를 저울질하는 눈치였다. 몇 초, 그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손을 풀었다.
"씨발."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그는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뒷모습에 담긴 것은 원한이었다. 어깨를 잔뜩 세운 채, 걸음마다 분을 씹어 삼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는 끝났지만, 이 일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정우진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벽에 등을 대고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벌어진 일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저 상황에 끼어들었던가. 내가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렀던가. 몸이 기억하는 것과 머리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시차가 있었다.
"괜찮아?"
강서연에게 물었다. 그녀는 팔을 문지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우진이 붙잡았던 자리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자국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문지르다가, 큰 눈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의 혐오나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뭔가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 남아 있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그녀는 나를 뜯어보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진우 선생님, 안 오는 거지?"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짓말이었어."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굳이 숨겨서 좋을 게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스쳤다. 옅고 짧은, 그러나 분명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방금까지의 분위기와 너무 달라서, 나는 잠시 어색함을 느꼈다.
"똑똑하네."
그 말이 이상하게도 오래 귀에 남았다. 짧은 두 마디였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단순한 감탄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괜찮으면 갈게. 나 밥 먹으러 가야 해서."
사실이었다. 도시락은 아직 벤치 위에 남겨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의 무게가, 뒤늦게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돌아서려는 나를, 그녀가 붙잡았다. 손목을 잡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그 목소리가 어깨를 붙잡는 듯한 무게로 다가왔다.
"이름이 뭐야?"
"이도현."
"나는 강서연."
짧은 자기소개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뭔가 결심한 듯한 색이 담겨 있었다. 그 색을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방금까지의 그녀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고마워, 이도현."
그 말투가, 단순한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여운을 남기려는 듯한, 계산된 듣기 좋은 어조였다. 나는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그 순간까지 알 수 없었다.
벤치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어귀에 그녀는 여전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팔짱을 낀 채, 방금까지 겁에 질려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자세로.
식은 도시락을 다시 열었을 때, 나는 밥을 먹는 대신 한동안 그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손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았다. 정우진의 얼굴, 강서연의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가 남긴 그 미소. 세 장면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이상한 불안감을 만들어냈다.
이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후 수업 시간, 나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정우진이 있는 반 쪽을 떠올렸다. 그가 이 일을 그냥 넘길 사람일까. 원한이 담긴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 절대 아니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강서연은. 그녀는 왜 그렇게 나를 오래 바라보았을까. 그 눈빛에 담긴 결심이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이 하루가 결코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