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투명인간인데 도시락이라니

4화

정우진이 다시 움직인 건, 강서연이 벤치를 찾아오기 시작한 지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방과 후, 나는 늦게까지 남아 미뤄둔 과제를 정리하고 있었다. 교실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지지직거리며 깜빡였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고, 운동장 쪽에서 들려오던 마지막 발걸음 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복도의 조명도 반쯤 꺼져 있었다. 절반은 켜지고 절반은 꺼진 그 불빛이, 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방을 챙기며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었다. 강서연이 벤치에서 웃으며 했던 말, 사소한 농담들, 그 애 특유의 눈웃음. 그런 사소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기에, 교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기 시작했다. 중앙에 정우진이 서 있었다. 양옆으로 처음 보는 얼굴 둘. 다른 반 학생들인 듯했다. 체격이 좋은 쪽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고, 마른 쪽은 실실 웃으며 껌을 씹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흥미와 조소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이도현이라고 했지." 정우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골목에서 봤던 그 짓눌린 짐승 같은 눈빛이, 이제는 확실한 계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은 분노에 눈이 뒤집혀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아는 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할 얘기 있으면 해." 나는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썼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고,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 셋을 상대로 이 좁은 복도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나는 빠르게 계산했다. 복도는 좁았고, 양쪽은 교실 문으로 막혀 있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그들이 서 있는 방향과, 내 등 뒤의 벽뿐이었다. "강서연이랑 요즘 잘 지낸다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 있지. 걔 원래 내 거였어야 했거든." 그 말이 얼마나 뒤틀린 논리인지, 정우진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강서연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발로 걷고, 자기 입으로 웃고, 자기 마음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소유물이 될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정우진 같은 사람에게 논리는 처음부터 통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양옆의 두 사람이 슬며시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시멘트의 감촉이 셔츠를 뚫고 전해졌다. "저번엔 하진우 선생님 이름 팔아서 도망쳤지." 정우진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여유로운 미소였다. "근데 오늘은 진짜 아무도 없어. 확인했거든." 순간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엔 정말로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복도 끝 계단, 반대편 교무실 방향. 거리를 가늠했지만 셋을 뚫고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마른 쪽 애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듯 손을 넣었다가 다시 빼는 게 보였다. 확인하듯 나를 떠보는 동작이었다. 체격 좋은 쪽이 한 발 더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셀 수 없이 많은 계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이 좁은 공간에서, 셋을 상대로,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럼 지금 담임 선생님이 저기 계신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즉흥적으로 만든 거짓말이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도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정우진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뭐?" "방금 저기 교무실 불 켜지는 거 봤거든. 아마 야근하시는 것 같던데." 나는 손가락으로 복도 반대편을 가리켰다. 사실 확인할 방법도 없는 순간이었지만, 정우진의 눈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사람은 의심이 생기면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었고,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거짓말이지." "확인해보면 알잖아."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었다. 정우진은 잠시 망설이더니, 옆에 있던 애들에게 눈짓을 했다. 한 명이 복도 반대편으로 슬쩍 걸어가 확인하러 갔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지지직 소리를 냈다. 남은 두 명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우진의 시선은 잠깐 복도 끝으로, 다시 나에게로, 그리고 다시 복도 끝으로 오갔다. 그 흔들리는 시선 하나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쥔 유일한 패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만약 저기 정말 아무도 없다면. 만약 그 애가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데"라고 말한다면. 그 다음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불 켜져 있는데." 그 애가 돌아와 말했다. 나는 안도를 삼켰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 불빛이 정말 담임의 것인지는 나도 몰랐다. 학교에 남아 있는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청소하는 분일 수도, 다른 선생님일 수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들이 믿을 만한 근거였다. 그리고 그 근거는, 다행히도 충분했다. 정우진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걸, 그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그가 물러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패배감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마치 이건 단지 오늘의 사냥이 실패한 것일 뿐, 사냥 자체를 포기한 게 아니라는 듯한 여유. "하지만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순 없을걸." 그 말을 남기고 그들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숨을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미끄러져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여전히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닦았지만, 손 전체가 떨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방금 있었던 일을 다시 재생했다. 정우진의 눈빛, 양옆 두 사람의 무언의 압박, 그리고 내가 던진 그 거짓말이 통했던 그 짧은 순간. 다음번에도 통할까. 다음엔 정말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한참 후에야 나는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겼다. 다리에 아직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교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일을 강서연에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묻어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그녀는 분명 자기 탓이라며 자책할 것이고, 어쩌면 정우진을 직접 찾아가 따질지도 몰랐다. 그건 최악의 결과였다. 교문을 나서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거리는 이미 저녁의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서, 나는 뜻밖에도 강서연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가, 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과제 좀 하다가." 나는 대충 둘러댔다. 목소리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신경 썼지만, 그게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무언가 눈치챈 듯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눈은 항상 그랬다.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 지나치게 예리한 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어." "얼굴이 하얗잖아." 그녀의 시선이 집요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걸음을 맞췄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와 스칠 듯 가까웠다. "말 안 해줄 거면, 나 혼자 알아볼 거야." "그런 게 아니고." "이도현."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큰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했다. 골목의 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도 그 눈빛만은 또렷했다. "나 때문에 무슨 일 생긴 거면, 알아야 해."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진지한 어조였고, 그 진지함이 오히려 나를 더 궁지로 몰았다. 나는 그 순간 그녀에게 오늘 일을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정우진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화를 낼까. 걱정할까. 아니면 둘 다일까. 정우진의 눈빛, 그 냉소적인 마지막 말이 자꾸 귓가에 울렸다.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순 없을걸."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거짓말 하나가 통했고, 셋 다 그 거짓말을 믿을 만큼 어리숙했다. 하지만 다음번엔, 그리고 그 다음번엔. 강서연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입을 열 수도, 다물 수도 없는 채로 서 있었다. 골목 어귀의 가로등이 깜빡이며, 우리 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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