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바람이 멈췄다.
절벽 위,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발밑으로 흙이 부서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래는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밀려던 순간이었다.
"뛸 거면 미리 말을 해. 심심하니까 구경이나 하려고 했지."
돌아섰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이었다.
이 절벽은, 이 시간엔, 늘 나 혼자였다.
남자가 서 있었다.
중세 복고풍 의상,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재킷.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얼굴에도, 옷에도, 손등에도.
하지만 신음 소리는 없었다.
아픈 기색도 없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헛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누구야."
"자기소개는 좋아하는데, 지금 상황이 그럴 때는 아닌 것 같고."
남자가 손을 툭툭 털었다.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선홍색이 아니었다.
검붉었다.
마치 오래 굳어 말라가는 색이었다.
"탄형이라고 불러."
"뭐?"
"별명이야. 본명은 발음이 힘들어서 다들 그렇게 불러."
"본명이 뭔데."
"사탄."
숨이 멈췄다.
목구멍 안쪽이 순간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말을 이으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탄.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사탄. 사탄. 사탄.
남자, 아니 탄형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장난하는 거지."
"그럴 리가. 이 몰골로 장난할 정신이 어디 있어."
그가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찢어진 옷, 피, 상처.
"봐. 나도 방금 뭘 좀 겪었거든. 위에서 좀 시끄러웠어."
"위?"
"천상. 관리부. 뭐라 불러도 상관없어. 어쨌든 지금 나는 너 앞에 있고, 너는 방금 뛰려고 했고."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 뒤쪽 근육이 제멋대로 떨렸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절벽 끝에서 겨우 두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바람이 다시 불면 그대로 밀려날 것 같았다.
"그거 알아? 인간은 죽기 직전에 제일 정직해져."
탄형이 한 발 다가왔다.
"그래서 이 시간에 오는 거야. 진짜로 원하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까."
"뭘 원한다는 거야."
"복수. 명예. 인정. 뭐든."
손끝이 차가워졌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박덕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기석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람들 앞에서 웃던 얼굴, 뒤에서 속삭이던 소문.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탄형이 손가락을 들었다.
"영광의 힘.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는 순간, 네 힘이 강해져. 시선이 곧 연료야."
"그게 무슨 소리야."
"박덕수. 지기석. 소문내는 놈들. 널 무시하는 모든 눈. 그 눈들이 네 편이 될 수 있다는 소리야."
귀가 의심스러웠다.
한 번 더 물어야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믿고 싶은 마음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동시에 부딫혔다.
그 부딫힘 속에서 몸만 자꾸 앞으로 기울었다.
"조건은?"
"조건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 좋아. 똑똑하네."
탄형이 손가락을 접었다.
"10년. 10년 안에 세계 최대 종교를 세워."
"뭐?"
"들은 대로야. 신도 수, 영향력, 뭐든 세계 1위. 10년 안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커서 실감이 안 나는 숫자였다.
세계 최대.
1위.
10년.
그 세 마디가 머릿속에서 겹쳐지며 아무런 그림도 그려내지 못했다.
"미쳤어."
"미친 놈한테 미쳤다고 하면 좀 그렇지 않아?"
웃음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싫으면 지금 뛰어. 안 말려."
절벽 아래를 흘긋 봤다.
다리가 떨렸다.
숨이 짧아졌다.
바람이 옷깃을 흔들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는 여전히 어둠이었다.
그 어둠이 지금까지의 삶보다 편해 보였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대가는 뭔데."
겨우 물었다.
"뭘 줘야 되는 거야."
탄형의 표정이 잠깐 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눈빛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숫자를 보는 눈, 계산을 하는 눈이었다.
"그건 지금 말해도 못 알아들어."
"알아들을 수 있어."
"아니, 못 알아들어. 계약서에 손 대면 알게 될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네가 아직 그 말을 이해할 몸이 아니라는 거야."
무슨 뜻인지 되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에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
피 냄새가 섞인 종이였다.
글씨는 라틴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었다.
둘 다 아닌 것 같으면서 둘 다인 것 같았다.
읽으려 하면 머릿속에 뜻만 흘러들어왔다.
눈으로 글자를 좇는 게 아니었다.
뜻이 먼저 도착하고, 그 다음에 눈이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불편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계약자: 이도윤]
[조건: 세계 최대 종교의 창립, 10년 이내]
[대가: 계약 위반 시, 혹은 힘의 사용에 따라 발생]
[서명: 손바닥]
"대가 항목이 왜 이렇게 흐릿해."
"그거야 아직 안 정해졌으니까."
"아직 안 정해졌다고?"
"대가는 네가 만드는 거야. 힘을 쓰면 쓸수록 정해져."
"그게 계약이라는 거야? 대가도 모르고 서명하라는 게?"
"세상에 대가를 다 알고 하는 계약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절벽 아래, 바람이 다시 세게 불었다.
등이 흠뻑 젖었다.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시계를 본 것도 아닌데, 시간이 줄어드는 감각이 있었다.
탄형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씩 넓어지는 걸로 그걸 느꼈다.
저 미소가 완성되기 전에 뭔가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왔다.
"싫다고 하면?"
"그럼 넌 오늘 밤 여기서 떨어져 죽거나, 내일 노숙자가 되겠지."
탄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상관없어. 계약자는 많으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나 하나쯤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태도.
시장에서 흔한 재고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계약자들 중 하나.
줄지어 서 있는 익명의 목록 속 한 줄.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발밑이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내 결정이 아니라 저 남자의 무관심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밥은 먹었어?"
뇌리에 소원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삶은 계란의 온기.
손톱에 낀 흙.
소원의 손이 내 손에 계란을 쥐여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껍질을 까느라 손톱 밑에 흙이 낀 것도 모르고 웃던 얼굴.
그 웃음 하나 때문에 오늘까지 버텨온 거였다.
그런데 오늘, 그 웃음마저 놓아버릴 뻔했다.
숨을 삼켰다.
"할게."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온 순간,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말이 뱉어지자마자 배 속에서 뭔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
그 다음에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좋은 선택이야."
탄형이 종이를 내 앞으로 밀었다.
"손 대. 서명은 안 해도 돼. 대는 순간 계약이 성립하니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렸다.
멈추고 싶은 마음과 이미 늦었다는 확신이 동시에 손끝을 지나갔다.
손끝이 종이에 닿았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손끝에서부터 뱃속까지 치솟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비명이 나오려는데 목이 막혔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피부 아래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불이 아니었다.
불보다 더 안쪽에서 타는, 뼈까지 스며드는 열기였다.
배 위, 살갗 아래에서 뭔가가 그려지고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운 통증.
오각형 모양이었다.
그런데 뒤집혀 있었다.
선 하나가 그려질 때마다 신음이 아니라 숨이 끊어졌다.
다섯 개의 꼭짓점이 살갗 아래에서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그 감각이 지나갈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쓰러졌다.
땅바닥의 흙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소원의 손톱에 낀 흙을 떠올리게 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 생각에 입꼬리가 잠깐 움직였다.
곧바로 통증이 그 웃음을 지워버렸다.
탄형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승리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확인, 그리고 만족.
방금 산 물건을 살펴보는 눈빛이었다.
"환영해. 이제 우리는 파트너야."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 말 한마디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배 위의 통증이 한 번 더 크게 요동쳤다.
마치 새겨진 오각형이 살아있는 것처럼,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눈을 뜨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을 마지막으로, 절벽 위의 풍경이 검게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