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빛고등학교 2학년 3반, 점심시간이 끝나기 오 분 전이었다.
급식실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상에 엎드려 졸았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평범한 점심시간이었다.
창가 자리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유독 왁자하게 웃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늘 그렇듯 차도현이 있었다.
키가 크고,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접히는,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이.
농담 하나로 교실을 뒤집을 줄 아는 재주를 가진 아이였다.
"은서야."
한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자리는 창가에서 두 줄 떨어진 곳이었지만, 도현의 목소리는 언제나 크고 또렷했다.
"나랑 사귈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 초의 정적.
그리고 곧 폭소가 터졌다.
박민재가 책상을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야, 진지하게 물어봐야지 그게 뭐야."
"진지한데?"
도현이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밀었다.
장난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주변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고, 몇몇은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은서는 웃었다.
늘 하던 대로.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살짝 접고, 손을 흔들어 장난을 받아주는 그 표정.
수백 번은 해봤을 표정이었다.
"싫은데."
그렇게 넘기면 되는 거였다.
원래는 그랬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도현의 눈빛이 아주 잠깐, 진짜처럼 보였던 것이다.
장난스러운 웃음 속에 섞인, 아주 미세한 흔들림.
심장이 이상하게 쿵, 내려앉았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뭐야, 방금 그거.'
손끝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도현이 자리로 돌아가며 민재와 손바닥을 부딪쳤다.
탁,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내가 이겼지? 은서 표정 봤어? 완전 당황했잖아."
"어어, 봤어 봤어. 십만 원 내놔."
민재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장난한 거예요?"
은서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힘없는 목소리였다.
"어, 내가 얘랑 내기했거든. 너 웃게 만들 수 있다고."
도현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쟤가 너 얼음공주라고 해서, 내가 절대 안 그렇다고 했지."
"얼음공주 아니고 얼음마녀."
"뭐가 다른데?"
민재가 옆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교실 안의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누군가는 "역시 은서 상대는 안 되지" 하며 놀렸고, 또 누군가는 "십만 원 진짜야?" 하며 도현을 붙잡고 흔들었다.
은서는 계속 웃고 있었다.
입꼬리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아프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목 끝이 뜨끈해지면서 뭔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숨을 짧게 삼켰다.
울면 안 된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별거 아니야, 늘 있던 장난이야, 도현이 원래 저런 애잖아.
그런데도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화장실 좀."
은서는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드르륵, 소리를 냈다.
누구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도 자주 그러던 아이였으니까.
밝고, 붙임성 좋고, 반의 중심.
장난을 잘 받아주고, 잘 웃고, 화나는 법이 없는 아이.
그 웃음 뒤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은서 스스로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또 한 번 폭소가 터졌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수업 종이 곧 울릴 시간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하얗게 느껴졌다.
은서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 자판기 앞까지 걸어갔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별거 아니잖아. 매번 하던 장난이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목이 막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 한복판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려던 손이 미끄러졌다.
동전이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타타닥.
동전이 자판기 옆에 서 있던 누군가의 발치에서 멈췄다.
은서가 시선을 들었다.
이서준이었다.
같은 반이지만 말을 섞어본 적은 거의 없는 아이.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고, 늘 창가 맨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아이.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존재였다.
서준이 몸을 굽혀 동전을 주웠다.
손끝이 길고 마디가 얇았다.
"떨어졌어요."
건네는 손이 무심했다.
은서는 얼른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동전을 받았다.
"고마워."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들릴 만큼 확연하게.
서준이 은서의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
오래 보진 않았다.
딱 한 번, 스쳐 지나가듯.
하지만 그 짧은 시선에 은서는 심장이 철렁했다.
'봤나. 운 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서준의 시선이 눈가에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는 게, 이상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뽑으려던 음료 버튼을 눌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캔이 떨어졌다.
서준은 그걸 집어 들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은서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셔요."
"어?"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캔을 받아야 하는 건지, 사양해야 하는 건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목 아픈 것 같아서."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은서는 얼떨결에 캔을 받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온도였다.
서준은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이어폰 줄이 목덜미에서 흔들렸다.
걸음걸이는 여느 때처럼 느릿하고 조용했다.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은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뭐야, 저 사람.'
방금까지 목 끝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이상하게도 스르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설명하기 어려운, 낯선 감정이었다.
울다 말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캔을 만지작거리며 은서는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서준이 사라진 복도 끝을 몇 번이나 다시 쳐다봤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경쾌한, 익숙한 발소리였다.
도현의 목소리였다.
"은서야, 여기 있었네?"
은서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었다.
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까지의 감정이 뭐였는지, 다시 정리할 틈도 없이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 지금.'
도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