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안 웃기로 했다

4화

체육대회 날,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아래로 운동장에는 반별 텐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빨강, 파랑, 초록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여기저기서 응원 소리가 터졌다. "3반 파이팅! 3반 파이팅!" 목이 쉰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은서는 텐트 그늘에 앉아 다음 순서를 확인했다. 2인3각 경기. 오후 첫 순서였다. '하필 이거랑 짝이 됐네.' 명단에 적힌 이름을 다시 봤다. 이서준. 담담하고 서늘한 이름 세 글자. 은서는 괜히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땀이 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손이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출발선 쪽으로 걸어가자 서준이 먼저 와 있었다. 체육복 차림이었지만 여전히 반듯한 자세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조각처럼 미동도 없었다. "어, 왔어요?" 서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왔어." 은서가 슬쩍 웃었다. 체육 선생님이 다가와 두 사람의 발목을 끈으로 묶었다. "자, 너무 세게 당기지 말고. 리듬 맞춰서 걸으면 돼." 끈이 조여지는 느낌이 낯설었다. 은서는 서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균형을 잡기 위한 최소한의 접촉이었는데도 손끝이 저릿했다. "떨려." 은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발 맞춰서 걸으면 돼요." 서준이 대답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은서는 그 안에서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갑자기 단단한 갑판을 밟은 기분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두 사람은 작게 구령을 맞춰봤다. 옆 라인에서는 다른 반 아이들이 벌써부터 꺄르르 웃으며 넘어지고 있었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준비, 땅!" 두 사람은 동시에 발을 뗐다. 처음엔 박자가 어긋나서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은서의 오른발과 서준의 왼발이 부딪혔다. "아, 잠깐, 반대로." "네, 다시." 은서가 앞으로 넘어질 뻔했을 때, 서준이 재빨리 손을 뻗어 팔을 잡아줬다. 손끝이 팔뚝을 스치는 순간, 은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손이 빨라.' "괜찮아요?" "응, 고마워." 두 사람은 다시 발을 맞췄다. "하나, 둘, 하나, 둘." 리듬이 점점 맞아 들어갔다. 발이 서로의 박자에 맞춰지자 마치 원래부터 함께 걸어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주변에서 함성이 터졌다. "3반, 3반!" 민재가 텐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야, 저 둘 완전 신들렸다!" 은서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웃음이 났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준의 옆얼굴을 슬쩍 봤다. 땀이 흐르는 턱선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에 집중한, 살아 있는 표정.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이런 얼굴도 있었네.' 은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둘은 동시에 균형을 잃고 함께 잔디밭에 넘어졌다. 풀 냄새가 코끝에 확 퍼졌다. 웃음이 터졌다. "괜찮아요?" 서준이 먼저 물었다. "응, 완전 웃겨." 은서가 배를 잡고 웃었다. 옆으로 넘어진 서준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가까워, 너무 가까워.' 은서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순위는 3등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발목의 끈을 풀면서도 은서는 계속 웃고 있었다. 텐트로 돌아오는 길, 도현이 다가왔다. 농구화를 신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걸음걸이가 어딘가 급해 보였다. "어, 잘 뛰던데?" "어, 그냥 운이 좋았어." 은서가 웃으며 받았다. 도현이 서준을 바라봤다. 표정에 미묘한 긴장이 스쳤다. 시선이 위아래로 서준을 훑었다. "너 원래 운동 잘해?" "아니요." 서준이 짧게 답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도현이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민재가 옆에서 낄낄거렸다. "봤지? 둘이 완전 잘 맞던데. 무슨 커플 예능 찍는 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도현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평소보다 톤이 한 단계 높았다. 민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화를 내? 그냥 사실을 말한 건데." "화 안 났어." "화났는데." 도현은 대답 없이 텐트 쪽으로 걸어갔다. 민재가 뒤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저거 봐, 완전 화났네." 오후 늦게, 경기가 모두 끝나고 아이들이 각자 흩어졌다. 운동장 곳곳에 쓰레기와 응원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방송에서는 종합 순위를 발표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은서는 매점 근처 자판기 앞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었다. 다리가 뻐근했다. 발목에 끈이 묶였던 자리가 아직도 얼얼했다. 그때 서준이 다가와 캔 하나를 내밀었다. 시원한 캔 표면에 이슬이 잔뜩 맺혀 있었다. "고생했어요." "어, 고마워." 은서가 캔을 받으며 웃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그제야 몸에 열이 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둘은 자판기 옆 그늘에 나란히 앉았다. 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오늘 좀 재밌었어." 은서가 캔을 따며 말했다. 탄산 소리가 파식 하고 울렸다. "저도요." "신기하다. 넌 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았는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그냥, 오늘은 나쁘지 않았어요." 은서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캔을 한 입 마시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낮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 사실." 은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서준이 고개를 돌려 은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은서는 잠깐 말을 삼켰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날, 자판기 앞에서." "네." "그냥 장난 고백에 상처받은 거였어." 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아팠는지 모르겠더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꺼낼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듣고 있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캔을 만지는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매번 웃고 넘겼는데, 이번엔 안 되더라." 은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웃고 있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말끝이 흐려지며 그 자리에 어색한 침묵이 잠깐 내려앉았다. 서준이 그 표정을 조용히 바라봤다. 시선이 은서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몇 번이고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은서는 그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텐트 쪽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 여기 있었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은서와 서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도현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있었다. 캔을 나눠 마시며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그 사이의 거리가, 그 사이에 흐르던 공기가, 도현의 눈에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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