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도현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벤치 위, 캔 음료 두 개.
거리는 가까웠지만 딱히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뭐 해, 둘이."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낮고, 느렸다.
은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캔이 벤치 위에서 살짝 기울었다.
"그냥 쉬고 있었어."
"그렇게 보이네."
도현이 짧게 대답하고는 서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캔을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캔 뚜껑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 났다.
도현의 시선이 그 손가락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은서에게로 돌아왔다.
"둘이 꽤 친해진 것 같은데."
"그냥 아는 사이야."
은서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그것도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스스로도 그 말을 하면서 어색함을 느꼈다.
'왜 나는 이 말을 벌써 두 번째 쓰는 거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지,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은서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입꼬리를 올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었다.
도현은 잠깐 은서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풀었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그래, 뭐. 이따 반 애들 다 같이 밥 먹기로 했으니까 와."
"응, 알겠어."
"너도."
도현이 서준을 향해 짧게 덧붙였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도현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은서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준이 조용히 물었다.
"불편하실까 봐요."
"뭐가?"
"저랑 있는 거."
은서는 순간 말이 막혔다.
가슴 한쪽이 콱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왜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물어보지.'
직설적인 질문이 늘 예상보다 빨리 훅 들어왔다.
"아니, 괜찮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은 복잡했다.
도현의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짧은 순간, 눈빛에 스쳤던 뭔가.
서운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착각이었을까.
은서는 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
그날 저녁, 은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서준을 다시 마주쳤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게 처음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집이 이쪽이었어?"
"네, 저 골목 앞이에요."
서준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 늘어선 골목이었다.
낡은 담벼락에 담쟁이가 얽혀 있었다.
"나는 저기."
은서가 반대쪽,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높은 건물들이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깐 나란히 걸었다.
발소리가 조용한 저녁 골목에 또박또박 울렸다.
"너 원래 이렇게 조용한 편이었어?"
은서가 물었다.
"네."
"왜?"
서준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안 그랬어요."
"그럼?"
"중학교 땐 좀 활발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말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은서는 그 말의 무게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결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그냥 조용한 게 편해요."
서준의 목소리에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쓸쓸하게 들렸다.
마치 오래전에 포기한 것을 담담하게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뭔가 있었구나.'
은서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나도 사실, 항상 웃는 게 습관이 됐어."
"습관이요?"
서준이 걸음을 늦추며 은서를 돌아봤다.
"응.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웃으면 다들 안심하니까."
"부모님이요?"
"응,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었겠어요."
"딱히 힘든 줄도 몰랐어. 그냥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은서는 스스로 놀랐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꺼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서준이 은서를 바라봤다.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근데 그날은 안 됐어."
"자판기 앞에서요."
"응."
두 사람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정적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서준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갈라지네요."
"그러네."
은서가 손을 흔들었다.
손끝이 조금 어색하게 흔들렸다.
"내일 봐."
"네."
서준이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은서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오늘 고마웠어.]
화면 위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이걸 보내는 게 맞나.'
괜히 오해를 살 것 같기도 하고, 안 보내면 아쉬울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그냥 인사잖아. 별거 아니잖아.'
'아니, 이건 좀 이상해. 왜 굳이 이런 걸 보내려고 하는 거야.'
은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화면을 꺼버렸다.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은 채 남았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
몇몇 아이들이 은서를 힐끗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민재가 은서를 보자마자 히죽거렸다.
"야, 은서야. 어제 둘이 같이 집에 갔다며?"
목소리가 교실 전체에 들릴 만큼 컸다.
은서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봤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 골목, 그 시간, 누가 그걸 보고 있었단 말인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교실 안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서에게로 쏠렸다.
몇몇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고, 몇몇은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다.
하지만 은서에게는 그 모든 시선이 하나같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민재가 팔짱을 끼고 은서 앞으로 다가왔다.
"둘이 뭐야,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목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급하게 반응하는 거야.'
은서는 스스로도 그 반응에 당황했다.
민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씨익 웃었다.
"에이, 그런 거면 뭐 이렇게 급해."
주변 아이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얼른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책상 위에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손이 살짝 떨렸다.
도현은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은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가슴속에서 뭔가 답답한 게 부풀어 올랐다.
교실 안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