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람판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을 올라갔다.
11월 초였다. 바람이 벌써 매웠다.
반상회 총무 아주머니가 부탁한 일이었다. 새로 이사 온 집에 회람판을 돌려달라고. 아주머니는 무릎이 안 좋아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다고, 젊은 사람이 좀 대신 해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 집은 우리 집에서 세 걸음 거리였다. 낮은 담장, 파란 지붕. 원래 노부부가 살던 빈집이었는데 지난주부터 이삿짐이 들어오는 걸 봤다. 트럭 두 대가 좁은 골목을 막고 서 있었고, 사람들이 짐을 나르는 소리가 하루 종일 들렸다.
그때는 누가 들어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시끄럽다고만 생각했다.
담장을 따라 걸으며 회람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겉장이 낡아서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이 동네에서 몇 번째 손을 거쳤는지 모를 만큼 오래된 물건이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골목이 조용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슬리퍼 소리가 아니었다. 굽 있는 신발 소리였다.
이상했다. 집 안에서 굽 있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문이 열렸다.
금발이었다. 정확히는 금발에 분홍이 섞인 머리. 이 동네에서는, 아니 이 나이대에도 흔치 않은 색이었다. 눈매가 짙게 그려져 있었고 입술은 붉었다. 낡은 담장 안에 서 있기에는 너무 화려한 사람이었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더 컸다. 어깨선이 곧았고, 헐렁한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흐트러진 느낌이 없었다.
"누구세요?" 그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값을 매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저, 옆집 사는 사람인데요. 반상회 회람판 좀 전해드리려고요."
나는 회람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받지 않고 문에 기댔다. 팔짱을 끼고 문틀에 어깨를 걸친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이서연." 회람판 겉장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여자가 읽었다. 발음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서연 씨구나. 나는 채린이에요. 윤채린."
윤채린이었다. 이름을 듣고도 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회람판을 얼른 넘기고 돌아가고 싶었다. 손끝이 회람판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들어와요.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아니요, 저는 그냥…"
"그럼 계속 서서 얘기할까요?" 그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태연했다.
웃음의 각도가 계산된 것처럼 정확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본 사람 같았다.
나는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 아직 반도 안 풀려 있었다. 상자들이 거실 한가운데 쌓여 있고, 그 위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가 걸쳐 있었다. 박스 사이로 향수 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향이었다.
"짐 정리는 안 하세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귀찮아서요." 그가 대충 대답했다. "누가 대신 해주면 좋을 텐데."
소파는 아직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였다. 그 위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았다.
"서연 씨, 몇 살이에요?"
"스물하나요."
"나보다 두 살 어리네. 나는 스물셋." 그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다리가 길게 뻗어 나왔다. "여기 혼자 살아요?"
"네."
"부모님은?"
"안 계세요."
말이 짧게 끊겼다. 그 여자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옮겨 집 안을 둘러보는 척했다.
"심심하지 않아요?"
질문이 이상하게 가까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더 짙어졌다. 발소리가 없었다. 마치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 색깔도 특이했다. 갈색인데 붉은 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 색이 반짝였다.
"서연 씨."
"네?"
"우리 자면 안 돼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 안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네…?"
"싫으면 말고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여기 사람 별로 없어서 심심할 것 같아서."
목소리에 죄책감 같은 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가벼웠다.
나는 회람판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었다. 다리가 이상하게 후들거렸다.
"저 갈게요."
"화났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왔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낮고 짧은 웃음. 조롱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크게 울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몇 걸음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골목의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발밑의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동안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방금 그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부끄러움 없이 웃던 얼굴. 붉은 입술과 짙은 눈매가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불을 뒤척이며 몇 번이나 몸을 돌렸다. 시계를 봤다.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위로 다른 얼굴이 겹쳤다.
할머니였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 할머니는 이 방에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죽을 끓여주셨다. 부엌에서 냄비 젓는 소리가 났다. 달그락. 달그락. 나무 숟가락이 냄비 벽을 긁는 소리였다.
"서연아, 이리 와서 먹어.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어."
할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낮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원래 이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나를 키웠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고, 그 뒤로는 할머니와 둘이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 화분에 물을 주셨고, 저녁이면 라디오를 틀어놓고 뜨개질을 하셨다.
그러다 지난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을 때, 할머니의 손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종이처럼 얇고 건조한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놓지 못하고 오래 붙잡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조문객이 많지 않았다. 나는 상복을 입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나를 힐끔거렸다.
"쟤가 그 집 손녀야?"
"혼자 남았다며."
"안됐다, 참."
안됐다는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남의 불행을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현관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신발을 벗었다. 집 안은 어두웠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할머니가 늘 틀어놓던 라디오 소리도, 물 주는 소리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인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가 뻐근했다. 밤새 웅크리고 잠든 자세였다. 목도 뻣뻣했다.
창문 밖으로 파란 지붕이 보였다.
그 집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빈집이었는데. 이제는 저 안에서 누군가 눈을 뜨고, 향수를 뿌리고, 소파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있을 거였다.
어제 그 여자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우리 자면 안 돼요?"
목소리의 억양까지 그대로 떠올랐다. 가볍고, 태연하고, 아무 무게도 없는 말투였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다시는 그 집 쪽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그때는 몰랐다.
창밖으로 파란 지붕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자꾸 그 집 쪽으로 신경이 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