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위험한 이웃, 다정한 유혹

4화

그 뒤로 채린은 자주 우리 집에 왔다. 처음엔 하루에 한 번, 그러다 어느새 매일이 되었다. 저녁을 같이 먹거나, 그냥 마루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어떤 날은 채린이 반찬을 몇 개 싸 들고 왔고, 어떤 날은 내가 끓인 된장국을 마주 앉아 나눠 먹었다. 채린은 국물을 뜨면서도 계속 말을 걸었다. "이거 서연 씨가 끓인 거예요? 손맛 좋네." "그냥 인터넷 보고 따라 한 거예요." "그래도 맛있어요." 채린은 그런 식으로 별것 아닌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숟가락을 쥔 손끝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채린은 말이 많았다. 나는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채린 앞에서는 조금씩 말이 늘었다. "서연 씨, 오늘은 뭐 했어요?" "문서 작업 좀 했어요." "매일 그거만 해요? 도대체 무슨 문서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냥, 번역이에요. 재미없는 일이에요." "재미없는데 왜 해요?" "돈 벌어야 하니까요." 채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마루를 채우면 텔레비전 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심심하지 않아요? 하루 종일 혼자 앉아서." 예전 같으면 이 질문에 당황했을 텐데, 이제는 아니었다. "채린 씨가 매일 오니까 안 심심해요." 채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그런 말 할 줄도 아네요?" "저도 사람이에요." "알아요. 근데 서연 씨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봐서." 채린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조금 더 내 쪽으로 기울였다. 텔레비전에서는 재방송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 둘 다 화면을 제대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날 채린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밤이 늦어질수록 그의 손짓이 조금씩 대담해졌다. 어깨를 툭 치거나, 팔을 스치거나. 한 번은 내 머리카락을 슬쩍 넘겨주기도 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스칠 때, 나는 숨을 잠깐 멈췄다. 나는 그때마다 몸이 굳었지만, 예전처럼 도망치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계속 다음 순간을 가늠했다. 이번엔 뭘 하려는 걸까, 이번엔 어디를 만지려는 걸까. 그 생각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저기," 나는 소파 한쪽 끝으로 조금 더 붙어 앉으며 말했다. "채린 씨." "응?"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저 이런 거, 잘 못 해요." "이런 거 뭐요?" "이렇게 가까이 앉는 거나, 스킨십 같은 거." 채린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그 짧은 정지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소리만 마루를 채웠다. "저는 채린 씨랑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근데 자꾸 이렇게 다가오면… 저는 그게 불편해요."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채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몸을 뒤로 뺐다. 소파가 살짝 눌렸다가 다시 펴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요." 처음 듣는 진짜 사과였다. 그전까지 채린이 하던 사과는 늘 웃음 뒤에 숨어 있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습관이에요, 이런 거. 나도 잘 안 고쳐져요." "고치라는 게 아니라요." 나는 손끝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냥 저한테는 조금씩 해줬으면 좋겠어요." 채린이 나를 물끄러미 봤다. 그 눈빛에 뭔가 다른 감정이 스쳤다. 놀람과 안도가 섞인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 보는 게 낯설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서연 씨, 이런 말 처음 하죠." "네." "고마워요. 진짜로." 채린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 동안 창밖을 봤다. 나는 그런 그의 옆얼굴을 보며, 이 사람도 나처럼 어딘가 서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로 채린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스킨십을 좋아했지만, 전처럼 무작정 다가오지는 않았다. 먼저 물었다. "손 잡아도 돼요?" "어깨에 기대도 돼요?" "오늘은 좀 붙어 앉아도 돼요?" 작은 질문들이었지만, 나에게는 크게 느껴졌다. 누군가 나의 경계를 존중해준다는 게 낯설고, 동시에 안심이 됐다. 나는 그 질문들에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짧게 "네" 하고 대답했고, 나중엔 스스로 팔을 조금 벌려주기도 했다. ***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동네는 좁았다. 골목 하나만 건너도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채린이 우리 집 대문을 넘는 모습을 몇 번 본 사람들이 있었는지, 어느 날부터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반상회 총무 아주머니가 지나가듯 물었다.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회비 장부를 끼고 있었다. "둘이 그렇게 친해졌어? 요즘 매일 같이 있던데." "그냥 이웃이에요." 나는 대충 대답했다. "이웃이라도 그렇게 매일 붙어 다니는 건 못 봤는데. 옆집 총각도 그러더라, 저 두 집 요즘 부쩍 친해진 것 같다고." "…그냥, 마음이 잘 맞아서요." 아주머니는 뭔가 더 캐물으려는 눈치였지만,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걸어가는 등 뒤로 아주머니의 시선이 오래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완전히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채린과 있으면 이상하게 편했다. 처음의 그 거부감은 많이 옅어졌고,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채린이 오는 시간이 되면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하게 됐고, 채린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예전처럼 채린이 오는 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대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보게 됐다. 그날 저녁도 채린이 왔다.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상자에는 리본이 삐뚜름하게 묶여 있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채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었어요?" 나는 물었다. "아니요. 그냥 서연 씨 얼굴 보고 싶어서요." 그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손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들어와요." 문을 열어주며, 나는 이 관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채린이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는 발소리,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작은 소리, 그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무섭지 않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케이크 상자를 열자 하얀 크림 위에 작은 초 하나가 꽂혀 있었다. 오늘은 내 생일도, 채린의 생일도 아니었다. "이건 왜…" "그냥이요. 축하할 일이 없어도 축하하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채린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다가, 문득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식탁 위 초의 불빛이 흔들렸다. 창밖으로는 어느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잠깐 들리다 멈췄다. 나는 그 조용한 순간 속에서, 채린의 눈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