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위험한 이웃, 다정한 유혹

5화

케이크를 먹으며 우리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냥 텔레비전을 켜놓고 각자 포크질을 했다. 화면에서는 누군가 웃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인지 뭔지, 자막이 화려하게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무도 그걸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탁. 탁. 채린은 케이크의 크림 부분만 조금씩 걷어내며 먹었다. 딸기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딸기 안 좋아해요?" "아, 그냥요." 채린이 포크로 딸기를 밀어냈다. "단 게 너무 많으면 속이 안 좋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케이크를 먹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러다 채린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포크를 든 손이 접시 위에서 멈춰 있었다. 크림이 포크 끝에서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연 씨." "네?" "나 오늘 아빠한테 전화 왔어요." 포크를 든 손이 멈췄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채린의 아버지 얘기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채린의 목소리는 조금씩 달라졌다. "뭐라고 하셨어요?" "회사 정리하는데 서류에 도장 찍으라고요. 그거밖에 없었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부도 안 물었어요. 그냥 서류 얘기만." "몇 년 만에 온 전화였는데." 채린이 웃으려다 실패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혹시나, 하고 받았거든요. 혹시 무슨 일 있나, 아니면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나, 그런 생각 하면서." "근데요?" "근데 그냥 팩스 보낼 서류 얘기였어요. 삼 분도 안 걸렸어요, 전화가."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화장 아래로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가의 아이라인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채린은 그걸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채린 씨…" "괜찮아요. 익숙해요." 채린이 애써 웃었다. 그 웃음이 지난번 웃음보다 훨씬 얇았다. "저희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요. 제가 뭘 해도 관심 없고, 제가 잘 되든 안 되든 그냥 회사에 도움이 되냐 안 되냐로만 봤어요." 채린이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쨍,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엄마는 제가 어릴 때 나갔고, 아빠는 저를 그냥 맡아서 키우는 것처럼 했어요. 사랑해서 키운 게 아니라, 책임이니까 키운 거예요."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요, 나 이런 모습 보여주려던 게 아닌데." "아니에요."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울어도 돼요." 채린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떨렸다. 작은 흐느낌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어쩐지 낯설었다. 늘 여유롭고 나긋한 그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처음 봤으니까. "나는 그냥, 누가 나 좀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그렇게 안 해줬어요. 몸으로만 나를 원했지, 진짜로 안아준 사람은 없었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요. 친구들은 제가 예쁘다고, 돈 많다고 붙었지 진짜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 어른이 되니까 더 심해졌고요." 채린이 젖은 눈으로 나를 봤다. "서연 씨는 처음이에요.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이렇게 있어주는 사람." 그 말에 뭔가가 명확해졌다. 채린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던 이유. 처음 만난 날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이유. 그건 욕망이 아니라 결핍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만져줄 때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 그런데 그 접촉조차 진심이 아니었던 사람. 나는 그런 채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채린은 화려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그냥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채린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채린이 순간 굳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마워요."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나는 그를 안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채린의 등은 생각보다 좁았다. 화려한 옷과 화장 뒤에 숨겨진 몸은 어쩐지 약해 보였다. 나는 그 등을 계속 쓸었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누군가 웃고 있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 한참 그렇게 있다가, 채린이 몸을 조금 떼며 나를 봤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마스카라가 눈 밑으로 흘러내려 얼룩져 있었다. 그런데도 채린은 그걸 신경 쓸 여유도 없어 보였다. "서연 씨." "네." "나 이러다 서연 씨한테 너무 의지할까 봐 겁나요." 채린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동작이 어쩐지 아이 같았다.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누구한테 이렇게 기대는 거, 저 진짜 안 하는데."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알겠다고, 그래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채린과 나 사이의 경계가 요즘 부쩍 흐려지고 있다는 걸, 나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친구 사이에 하는 위로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감정이 그 사이에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만 가볼게요." 채린이 일어섰다. "눈도 붓고, 이런 얼굴 계속 보여주기 싫어요." "괜찮은데요." "안 괜찮아요." 채린이 웃었다. 이번엔 조금 진짜 웃음에 가까웠다. 채린이 가방을 챙기며 거울도 안 보고 손으로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평소라면 절대 안 할 행동이었다.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갔다. 문 앞에서 채린이 잠깐 멈췄다. 신발을 신다 말고 채린이 고개를 돌렸다. 조명 아래로 그의 얼굴이 유난히 하얘 보였다. "서연 씨." "네?" "안아줘도 돼요? 마지막으로." 나는 잠깐 망설였다.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도 이미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됐다. 여기서 멈춰야 해. 여기서 더 가면 안 돼. 채린 씨는 그냥 힘들어서 그런 거야. 나까지 흔들리면 안 돼. 하지만 채린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흐려졌다. 붉게 부은 눈, 지워진 화장,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진짜 얼굴. 그걸 보고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팔을 벌렸다. 채린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예상보다 더 가까이 밀착됐다. 채린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두근, 두근, 두근. 그 소리가 내 귓가에 그대로 전해졌다. 채린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사람의 향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좋은 냄새였다. "고마워요, 서연 씨."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 그 순간, 채린의 손이 내 등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저 다정한 손길이라고 하기엔,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느리게. 손끝이 등을 타고 내려가다가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몸이 굳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문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채린의 머리카락이 내 뺨을 스쳤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렸다. 복도는 조용했다. 이 순간,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계속 경고음이 울렸다. 그런데도 나는, 팔을 풀지 못했다. 채린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