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0년마다, 반 전체 소환

3화

종례가 끝나고도 그 백광의 잔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 빛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의 형체처럼 보였던 그 윤곽이,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챙기면서도 계속 창밖을 살폈다. 운동장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도 없었고, 잔디 위로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애써 시선을 거두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쳤다. "강도현, 뭐 해. 안 가?" 서현이가 교실 문 앞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서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가방을 챙겨 나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표정들이 어두웠다. 누구도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뭔가를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오늘 좀 이상한 일들이 많았지?" 계단을 내려가며 서현이가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벼웠지만, 발걸음은 살짝 빨랐다. "정전에, 스피커 잡음에, 아까 그 빛까지." "너도 봤어? 그 빛?" "봤지. 뭔가 사람처럼 보이던데." 서현이의 목소리에도 살짝 긴장이 묻어 있었다. 계단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서현이의 얼굴에 얼룩처럼 걸렸다. "그냥... 반사광 아니었을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사광이 그렇게 사람 모양으로 뭉칠 리가 없잖아.) 서현이는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계단 끝에서 신발장 문이 열리는 소리, 실내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들이 뒤섞여 복도를 채웠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그 소음들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현관을 나서자 지호가 먼저 나와 있었다. 한소은과 나란히 서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더 굳어 보였다. "뭐 얘기해?" 다가가며 물었다. 지호가 흠칫 놀라며 돌아봤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 정전 얘기." 지호의 시선이 잠깐 소은이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소은이가 조용히 나를 보며 목례했다. 나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 넷이 함께 걸음을 옮겼다. 신발장을 지나 운동장으로 나서는 그 짧은 길에, 나는 괜히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나치게 평범한 오후였다. (그러니까 아까 그건 진짜 뭐였을까.)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순간이었다. 발밑이 가볍게 진동했다. "뭐야, 지진이야?" 서현이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균형을 잡으려 발을 벌렸다. 땅이 울리는 느낌이 발바닥을 타고 무릎까지 전해졌다. 운동장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운동장 전체가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빛은 순식간에 퍼졌다. 마치 물이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듯, 발밑에서 시작된 빛이 순식간에 운동장 전체를 덮었다.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문양이 떠올랐다. 조례 시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원을 중심으로 복잡한 선들이 학교 운동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선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그 사이사이로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이게 뭐야!" 아이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졌다. 선생님들도 놀라 뛰쳐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침착해!" 박준혁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이미 상황은 손을 벗어나 있었다. 누군가는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고, 누군가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빛은 운동장 전체를, 이미 경계도 없이 뒤덮고 있었으니까. 바닥에서 빛이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부유감이었다. (뭐야, 이거...)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서현이와 지호, 소은이 모두 같은 빛에 휩싸여 있었다. 서현이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고 있었고, 소은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지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은아!" 지호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한소은이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낙하였다. 소은이의 몸이 빛 속으로 반쯤 잠기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지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손을 뻗어 소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손짓 하나에 지호의 온몸이 함께 기울었다. "놓지 마!" 소은의 목소리가 빛의 소음 속에서 겨우 들렸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손목을 더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만큼 힘을 준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이 빛에 삼켜지듯 사라졌다. "지호야!" 나는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빛이 나를 완전히 뒤덮었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귀가 먹먹해졌고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마치 세상 전체가 정지한 것 같았다. 서현이의 얼굴도, 운동장의 풍경도, 그 무엇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하얀빛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낙하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뭐야, 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온몸이 자유낙하하듯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속이 울렁거렸고, 팔다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감각으로 알 수 없었다. 그저 떨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쿵.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통증이 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충격을 완화했다. 어깨와 등, 허리까지 순서대로 통증이 지나갔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울창한 숲이었다. 하지만 지구의 숲과는 어딘가 달랐다. 나무의 색이 이상할 만큼 진한 초록빛이었고, 잎사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미묘하게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공기마저 낯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에 닿는 냄새가 익숙한 흙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어딘가 달고, 어딘가 비릿한 그런 냄새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팠지만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옷을 털었다. 흙과 낙엽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서현아! 지호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숲의 정적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무 사이로 퍼져나갔다가 그대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다들 어디 갔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혼자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서도 익숙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의 색조차 지구와 달랐다. 연한 보랏빛이 섞인 하늘이 나무 사이로 비쳤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정말로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났다.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봤다. 화면은 켜졌지만,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액정 위로 흐릿하게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당연히 안 되겠지.) 나는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소리였다. 하지만 지구에서 들어본 적 없는, 낯설고 낮은 울림이었다. 소리는 배 속까지 울릴 만큼 낮고 무거웠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었다. (뭐지, 저 소리...)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의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발소리 비슷한 무언가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발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히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도구도 무기도 없었다. 스마트폰조차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도망쳐야 하는지, 숨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한심할 정도로 초라한 무기였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없었다. 손바닥에 닿는 나뭇가지의 거친 표면이 그나마 조금은 정신을 붙잡아 주는 것 같았다. 울음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숲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그 그림자의 크기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꽉 움켜쥐고 자세를 낮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떨렸다. 숨소리마저 조절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고 코로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나무 사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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