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0년마다, 반 전체 소환

5화

지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궜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캐묻지 않고 소은이의 발목을 살폈다. "많이 아파?" "조금... 삐끗한 것 같아요." 소은이가 작게 대답했다. 창백한 얼굴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리셰나가 다가와 무릎을 꿇고 소은의 발목을 짚었다. 손끝에서 옅은 초록빛이 퍼졌다. 빛은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발목을 감싸며 흘러 들어갔다. "골절은 아닙니다. 인대가 조금 놀란 정도입니다." 빛이 발목을 감싸자 소은이 옅게 숨을 내쉬었다. "아... 통증이 좀 가라앉았어요." "완치는 아닙니다. 며칠 안정이 필요합니다." 리셰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그 동작 하나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저 사람, 정말 이 세계 사람이구나.)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야영지 반대편에서 박준혁 선생님과 이도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 인원 확인 다시 한다!" 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애써 감춘 긴장이 배어 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이 야영지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서현이와 함께 아이들 사이를 살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 아이는 계속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마치 이 손이 진짜 자기 손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서현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투에도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호 쪽을 다시 봤다. 지호는 여전히 소은이 옆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 나를 향했다가 급히 피하곤 했다. 그 시선이 부딧히는 순간마다 지호의 손끝이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뭔가 나한테 말하려다 참는 것 같은데.) 박준혁 선생님이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침착하게 들어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분의 설명을 듣도록 하겠다." 선생님이 리셰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리셰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은백색 머리와 붉은 망토, 정교한 갑옷 차림에 여기저기서 작은 감탄이 흘렀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망토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저는 리셰나 로크하르트 팔렌시아입니다. 팔렌시아 왕국 소속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야영지 전체에 또렷하게 울렸다. 낮고 단정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여러분이 겪은 일은 백 년마다 발동하는 소환 마법진에 의한 것입니다. 이 마법진은 두 세계 사이의 오래된 연결을 통해 작동하며, 정확한 발동 원리는 왕국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웅성거림이 커졌다. "백 년마다요? 그럼 우리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 이번처럼 대규모로 발동한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리셰나가 짧게 대답했다.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예요?" 또 다른 누군가 손을 들며 물었다. 리셰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아이들의 숨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귀환은 가능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으며, 지금 당장 방법을 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왕국 측과 협의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박준혁 선생님이 이어서 말했다. "일단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리셰나 님의 협조 하에 왕국으로 이동해 정식으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이도윤 선생님이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불안한 건 알지만, 지금은 서로 협력하는 게 최선이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문득 지호를 다시 봤다. 지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주머니 속 무언가의 윤곽을 더듬듯 움직이고 있었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야.) 나는 슬쩍 다가가 물었다. "지호야, 아까 그 이어폰... 정전 때 들렸던 소리 말이야." 지호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그, 그거..." "뭐였어?" 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리셰나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이 세계의 마력에 특별한 형질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셰나의 다음 말에 아이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마력 형질이요?" "이 세계에는 개개인이 지닌 마력의 성질을 판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소환된 이들 중에는 이 세계의 마력과 특이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게...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옆에 있던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특이 형질을 지닌 이들은 이 세계에서 남다른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리셰나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에는 뭔가 특별한 무게가 있었다. 시선이 부딪힌 그 짧은 틈에,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옅은 흔들림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왜 나를 보는 거지.)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그저 그녀를 마주 봤다. 주변의 소음이 잠시 멀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판정은 나중에 진행하겠습니다. 지금은 휴식이 우선입니다." 리셰나가 시선을 거두며 말을 마쳤다. 박준혁 선생님이 학생들을 나누어 천막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지호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진짜, 무슨 일이야. 아까부터 계속 이상해." 지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몇 가지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도현아... 너 혹시, 그동안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한 적 없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지호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발걸음이 어딘가 도망치듯 빨랐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 그 말,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그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린다니,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천막으로 향했다. 그날 밤, 야영지에는 낯선 별빛이 쏟아졌다. 지구에서 본 적 없는 색의 별들이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별들이 하늘 전체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천막 밖에 앉아 그 별들을 바라봤다.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은 부드럽게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평화롭다고 느껴질 만큼 조용한 밤이었지만, 어딘가 그 고요함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리셰나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섰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 그녀가 다가온 것을 뒤늦게야 알아챘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요." "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도현 님. 내일 마력 형질 판정을 진행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리셰나의 표정은 평소의 담담함과 달리,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부탁이요?" "네.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 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주변의 벌레 소리조차 순간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마저 잠시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겠구나.) 별빛 아래, 그녀의 붉은 망토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바라보며,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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