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형이 왕도로 떠나던 날, 나는 마을 어귀까지 배웅을 나갔다.
아침부터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형은 새로 산 여행용 외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게 꼭 자기한테는 안 어울리는 옷 같았다.
원래 밭일이나 하던 손에 마차 손잡이를 잡은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형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금방 편지 보낼게."
"그래."
나는 웃어 보였다.
입꼬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려고 신경 썼다.
속으로는 벌써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형이 왕도로 가는 데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느라 우리 집 밭을 반쪽이나 팔았다는 사실, 그리고 남은 반쪽으로는 도저히 두 사람 먹고 살 수 없다는 계산까지.
형은 그런 걸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로 안 갔을 사람이었으니까.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퀴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형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손이 빨랐다.
망설일 시간 같은 건 이미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형의 안전을 빌러 신전 순례를 간다고 둘러댔다.
다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평민 형제가 서로 얼마나 애틋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옆집 아주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린 육포 몇 조각을 챙겨주셨다.
정작 그걸로 향할 곳은 신전이 아니었다.
나는 반대로 청운자작령 방향, 서쪽으로 걸었다.
등에는 아버지가 쓰시던 낡은 사냥용 단검 하나, 어머니가 남긴 손바닥만한 책 한 권.
그게 전부였다.
동전 몇 개와 마른 빵 조각도 있었지만 그건 굳이 셀 필요도 없었다.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숲길에 들어선 지 반나절쯤 되었을 때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빛이 어쩐지 스산했다.
낮에는 그냥 나무들이었는데, 해가 기울자 그 나무들이 죄다 사람 형상처럼 보였다.
마을 노인들이 말하던 대로였다.
숲은 어두워지면 다른 세계가 된다고.
그때는 그냥 노인들 특유의 겁주기라고 생각했다.
부스럭.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이번엔 확실했다.
뭔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면 소리도 같이 멈췄고, 다시 걸으면 소리도 다시 따라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칼자루가 미끌거렸다.
숨을 죽이고 뒤를 노려봤다.
나무 그늘 속에서 눈 두 개가 빛났다.
초록색이었다. 사람 눈은 아니었다.
크르릉.
낮게 우는 소리가 났다.
숨소리도 들렸다. 거칠고 습한, 뭔가를 씹어 삼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숨소리였다.
그늘에서 나온 건 개만한 몸집에 뒤틀린 뿔이 달린 짐승이었다.
숲쥐라고 부르기엔 너무 크고, 늑대라고 하기엔 형태가 기괴했다.
등가죽은 딱딱한 비늘처럼 보였고, 다리 관절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마물이었다.
등급 같은 건 몰랐지만 죽을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온 기분이었다.
"저기, 나 그쪽한테 별로 관심 없거든."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튀어나왔다.
왜 하필 이 순간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무서워서 머리가 이상하게 돌아간 거겠지.
짐승이 이빨을 드러냈다.
번쩍.
달빛에 송곳니가 빛났다.
저것에 물리면 어디가 먼저 뜯겨나갈지, 그런 계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놈이 튀어 올랐다.
공기가 확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철퍽.
젖은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입안에 흙 맛이 진하게 퍼졌다.
일어나기도 전에 놈이 다시 덤벼들었다.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그냥 눈 감고 찌른 거였다.
푹.
뭔가 살에 박히는 감각.
손목까지 타고 올라오는 뜨끈한 느낌.
짐승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톡, 하고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유 선천기술 '언어이해'가 발현되었습니다.】
귓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조하고 사무적인, 마치 관공서 안내 음성 같은 목소리.
뭐야 이거.
지금 이 상황에 시스템 알림까지 뜨는 건가.
놀랄 틈도 없이 짐승이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번엔 말로 들렸다.
[아프다. 아프다. 왜 찌르냐. 배가 고팠을 뿐이다.]
···방금 저 짐승이 말한 건가?
나는 단검을 쥔 채로 그대로 멈춰버렸다.
숲 속 공기가 갑자기 다르게 느껴졌다.
짐승도 뒤로 주춤 물러났다.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핥으며 나를 노려봤다.
눈빛에 원망이 섞여 있는 게 이상하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인간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 이상하다. 무섭다.]
무서운 건 나거든.
나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방금까지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대화가 되는 상황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도 너 죽일 생각 없었어. 놀라서 그런 거야."
내 말도 사람 말 그대로 나갔다.
짐승 쪽에서는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놈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상하게 경계가 조금 풀린 것 같은 자세로 바뀌었다.
[말이 통한다. 신기하다.]
짐승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너, 특이한 인간이다. 조심해라. 냄새 나는 것들이 온다.]
"냄새 나는 것들?"
대답도 없이 짐승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숲이 다시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마물의 말을 알아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방금 두 눈으로, 두 귀로 똑똑히 겪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책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전생 기억을 가진 사람만 극히 드물게 갖는다는 그 능력.
선천기술.
책 속에는 어렴풋한 전설처럼 적혀 있어서, 나는 그냥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늘 우리 형제에게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형한텐 빛 마법이 있었고, 나한텐 이런 게 있었나 보다.
형은 남들이 다 알아보는 화려한 재능을 갖고 왕도로 갔는데, 나는 마물이랑 말이나 섞는 재주를 갖고 이 숲에 처박혀 있었다.
공평하지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평한 걸 바란 적도 없었지만.
하지만 즐거워할 시간이 없었다.
짐승이 말한 '냄새 나는 것들'이 뭔지,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숲 저편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짐승 발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
발소리에 규칙이 있었다.
훈련받은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횃불 빛이 나무 사이로 어른거렸다.
그 빛이 흔들릴 때마다 심장도 같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이 숲에 누가.
나는 급히 단검을 숨기고 몸을 낮췄다.
젖은 흙 위에 몸을 바싹 붙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나는 그 발소리의 주인들이 누군지 알아내려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