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재의 그늘, 금기를 삼키다

5화

강태민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 마치 값어치를 재는 상인처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었다. 옷차림부터 신발 밑창까지, 심지어 내 등 뒤에 멘 낡은 배낭 끈까지 살피는 듯한 눈초리였다. 이 사람 뭐야, 나 지금 노예 시장에 나온 거야? 한소미가 서류를 조심스레 정리하며 우리 둘 사이 눈치를 살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강태민 씨, 지금 이 아이한테 뭘 하려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강태민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웃는 얼굴인데 왜 하나도 안 웃겨 보이는지 모르겠다. "소미 씨, 잠깐 뒷방 좀 빌려도 될까요." 한소미가 뭐라 더 물으려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철을 품에 안았다.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만 덧붙였다. * * * 뒷방은 길드 안쪽에 있는 좁고 어두운 창고였다. 먼지 쌓인 무기들과 낡은 지도가 벽에 걸려 있었다. 칼자루가 다 삭아 떨어질 것 같은 검 한 자루, 녹이 슨 방패,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뿔 달린 투구 하나. 이 사람 취미가 고물 수집인가. 강태민이 문을 닫자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가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애송아, 이름이 뭐냐." "이도현입니다." "이도현. 좋아." 그가 낡은 나무 상자에 앉으며 물었다. 상자가 그의 체중을 못 이기고 삐걱, 소리를 냈다. "고대 기술 중에 뭘 노리는 거냐. 고대 문명의 기계, 마물 사역, 아니면 악마 계약?" "···전부 다요." 말해놓고 나서도 스스로 좀 놀랐다.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강태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전부 다. 참 야심차네. 근데 그중 하나만 제대로 익혀도 목 걸릴 짓이라는 건 알지?" "압니다." "근데도 하겠다는 거고." "네." "이유가 뭐냐. 아까 말한 형 얘기 말고, 진짜 이유."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이었다. "형은 착합니다. 착한 사람이 제도에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걸 보고만 있고 싶지 않습니다." "···." 강태민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창고 안에 켜진 등불이 파직, 소리를 내며 한 번 흔들렸다. "나도 평민 출신이다." 갑작스런 말이었다. "열일곱에 던전 밑바닥에서 시작했지. 지금은 이 영지에서 알아주는 헌터가 됐다만, 그 사이에 죽은 동료가 몇인지 세다가 관뒀어." 그가 자기 팔을 걷어 보였다. 팔뚝을 가로지르는 굵은 흉터가 보였다. 허옇게 튀어나온 흉터 자국은 마치 오래된 지도에 그려진 강줄기처럼 구불거렸다. "이건 마물 사역술 배우다 생긴 거다." "당신도 금기를 배웠습니까?" "어설프게 조금."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완전히는 못 익혔어. 그거 익히려면 목숨을 몇 번 걸어야 하는지 몰라." 목숨을 몇 번 건다는 게 대체 어떤 계산법인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지금 물으면 괜히 겁먹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았으니까. "강태민 씨, 그 이야기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한소미가 문틈으로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강태민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괜찮아요, 소미 씨. 이 애송이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그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도현아, 딱 하나만 알려주지. 완전히 금기를 익히는 건 못 도와준다. 나도 그 정도 실력은 없어. 하지만 시작점은 알려줄 수 있어." 시작점이라니, 뭔가 대단한 걸 줄 것처럼 들리는데. 솔직히 말하면 기대보다 불안이 더 컸다. "시작점이요?" "이 근처 폐허에 고대 문명 유적이 하나 있어. 아무도 완전히 조사 못 한 곳이지. 위험해서 길드도 손 놓은 곳이야." 그가 지도를 하나 꺼내 벽에서 떼어냈다. 낡고 얼룩진 종이 위에 붉은 원이 그려진 지점이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이 스칠 때마다 바스슥 부서질 것처럼 얇았다. "거기 들어가서 살아 나오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거다. 얻는 게 없으면 죽는 거고."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죽는 것도 그냥 결과값 중 하나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알려주는 겁니까." "네가 죽을 것 같으면 안 알려줬겠지. 근데 넌 안 죽을 것 같아서."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나는 지도를 받아들었다. 종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니, 무거운 건 종이가 아니라 그 위에 그려진 붉은 원인 것 같았다. "대신 조건이 있다." 강태민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첫째, 거기 다녀온 뒤엔 반드시 나한테 보고해라. 실력 확인 좀 해보고 싶으니까." 둘째를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 "조건은 하나면 됐다. 됐다, 가라." 뭐야, 하나뿐이야. 괜히 긴장했잖아. 셋째, 넷째까지 나올까봐 마음의 준비를 다 해놨는데 손가락 하나로 끝이라니. 이 아저씨 조건 세울 때도 뭔가 대충 세우는 스타일인가 보다. * * * 강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툭툭 털었다. 먼지가 뭉텅 떨어져 나갔다.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말해주지." "뭡니까." "거기, 밤에 들어가지 마라. 낮에도 위험한데 밤엔 뭐가 나올지 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혼자 갈 생각이면 관둬. 하다못해 등급 낮은 동료 하나라도 데려가." 동료라니, 지금 내가 아는 사람이 이 영지에 몇이나 있다고. 형이 있긴 한데, 형을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강태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봤다. "고려해본다는 건 안 데려간다는 소리 같은데." 정확했다. 정곡을 찔려서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니 목숨이니까 니가 알아서 해라." 무책임한 말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투가 편했다. 한소미가 문을 열고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보내실 건가요? 저 유적, 3등급 이상 헌터들도 조사 실패했다고 하는 곳인데." "소미 씨, 저 눈빛 봤죠? 저거 말려도 안 듣는 눈이에요." 강태민이 낮게 웃었다. 한소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감사합니다." 강태민이 지도를 다시 한 번 손으로 두드리며 덧붙였다. "참고로 거기 입구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거다. 그거 함부로 만지지 마라. 손대는 순간 뭔 일이 일어나는지는 나도 모른다." 모른다면서 왜 겁을 주는 거야. 이 아저씨 사람 불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 * * 길드 밖으로 나온 나는 지도를 다시 펼쳐 봤다. 붉은 원이 그려진 지점은 성에서 하루 정도 떨어진 산속이었다. 지도에 그려진 산세는 험악하게 표현돼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럴지 걱정이 됐다. 【언어이해】가 발현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다음 위험이 코앞에 있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형에게 남은 시간이 2년 반이라면, 나에게 남은 시간도 그만큼이었다. 시간은 누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요 며칠 사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짐을 다시 정리하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슬슬 기울고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마치 핏빛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오늘 밤은 여관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유적으로 떠나기로 했다. 여관까지 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붉은 원이 그려진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면서, 머릿속으로 경로를 짜봤다. 산길이라면 최소 반나절, 거기서 유적까지 또 얼마나 걸릴지. 계산이 끝날 때쯤엔 이미 여관 앞이었다. 여관방에 짐을 풀고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 저편, 흰 로브를 입은 사람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숲에서 봤던 조사국 로브와 똑같은 색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저거, 착각이겠지.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사람은 조용히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방금 그거, 확실히 나 보고 있었지.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창문을 닫고 등을 기댄 채로,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숲에서 만났던 조사국 사람들이 나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너무 낙관적인 착각이었을까. 내일 유적으로 떠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다른 종류의 위험을 하나 더 짊어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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