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재의 그늘, 금기를 삼키다

3화

발소리는 결국 나를 지나쳐 갔다. 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쿵. 쿵. 쿵. 내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있었나 싶었다. 횃불 빛 아래 드러난 건 신전 문양이 박힌 흰 로브였다. 광명신국 조사국 사람들. 그들이 왜 이 시골 숲까지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로브 자락이 스치는 소리,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들이 어둠을 타고 흘러왔다. "이 근방에서 금기 마력 흔적이 감지됐다고 했다." "평민 마을 애송이 하나가 그랬다는 소문 아니었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애송이 하나.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나는 나무껍질에 손톱을 박아 넣듯 힘을 주며 버텼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저 로브 무리가 방향을 틀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내가 아니라 남의 것인 척 최대한 얕게, 천천히 뱉었다. "흔적이 벌써 사흘 전 거라던데, 이 근방에 남아 있을 리가." "위에서 시켰으니 하는 거지. 나도 이런 산길 걷기 싫다."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조금 숨을 크게 쉬었다. 조사국이 벌써 움직이고 있다는 건, 내가 생각보다 빨리 눈에 띄었다는 뜻이었다. 마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 정도로도 이렇게 되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을 굴려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숲 밖에서도, 어디에서도, 나는 더 이상 완전히 평범한 소년으로 지낼 수 없다는 것. 로브 무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나무 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부터 무릎, 허리까지 저려오는 감각이 느껴질 때쯤에야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한참 뒤,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다시 짐을 풀고 야영 준비를 했다. 작은 불을 피우고 배낭에서 어머니가 남긴 책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크기, 낡은 가죽 표지. 가죽 표면은 오래돼 갈라져 있었고, 모서리는 손에 닿아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어머니는 이 책을 늘 품에 넣고 다니셨다. 표지 안쪽에는 낯선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읽을 줄 몰랐다. 불빛에 비춰 보면 문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미묘하게 뒤틀려 보이기도 했다. 착각이겠지만. 어머니는 광명신국 귀족가에서 시녀로 일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들켜 도망쳐 나왔다고. 그 이야기를 해줄 때 어머니의 눈빛은 늘 조금 슬퍼 보였다. "도현아, 도윤아. 세상은 겉보기와 달라. 힘없는 사람은 늘 먼저 부서져."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이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이제는 뼈저리게 알겠다. 형과 나는 둘 다 아버지를 일찍 잃었다. 마물에게 습격당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피 냄새, 어머니의 비명, 그리고 형이 나를 붙잡고 뛰던 손의 온도. 손바닥이 땀에 젖어 미끄러웠는데도 형은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의 감각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 뒤로 몇 년을 더 버티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으로 남긴 건 이 책과, 형의 손을 붙잡고 하신 말씀이었다. "도윤이, 도현이. 서로를 지켜. 절대 혼자 두지 마."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도 어머니는 그 말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금 여기 있었다. 형은 몰랐다. 내가 이렇게 몰래 떠났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할지 눈에 보였다. "도현아, 위험한 짓 하지 마. 나 하나로 충분해." 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자기 하나가 다 짊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게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지, 형은 모르는 것 같았다. 밥그릇 하나를 놓고도 나보다 형이 먼저 굶고, 옷 한 벌을 놓고도 나보다 형이 먼저 헤진 걸 입었다. 그런 형을 보면서 나는 늘 뭔가 갚아야 할 빚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책을 펼쳐 다시 낯선 문자들을 훑었다. 읽을 수 없어도 손끝으로 만지고 있으면 어머니가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빛이 흔들렸다. 타닥. 장작이 튀는 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불꽃이 옆으로 눕고, 그림자가 나무들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숲의 소리는 낮에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예민하게 다가왔다. 부엉이 소리, 낙엽 밟는 작은 짐승 소리, 저 멀리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울음소리까지. 나는 책을 덮고 배낭에 다시 집어넣었다. 내일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혼자서. 그 생각을 하니 배 속이 조금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물러설 곳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숲을 빠져나오자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고, 멀리서 새 떼가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밤새 웅크렸던 몸을 펴자 관절 곳곳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멀리 청운자작령의 성벽이 보였다. 영지치고는 꽤 큰 성벽이었다. 돌을 쌓아 올린 성벽은 높이도 높이지만 두께도 상당해서, 저런 걸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돈이 들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뭐, 지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 안에 모험가 길드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금기 기술을 배우려면 우선 그런 조직과 접점을 만들어야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어머니 말대로 힘없는 사람은 늘 먼저 부서지니까. 걸음을 옮기며 나는 다시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조사국이 벌써 냄새를 맡았다는 건 위험한 신호였다. [언어이해]라는 능력이 얼마나 특이한 건지 정확히 몰랐다. 마물의 말을 알아듣는 게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나한테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능력일 뿐인데. 어머니의 책에도 이 단어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 나는 아직 읽어내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능력이 남들 눈에 조용히 넘어갈 만한 것이 아니라는 예감이었다.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짐을 실은 수레, 소금을 파는 상인, 아이를 업은 여인,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까지. 성문 앞에 도착하자 위병이 나를 세웠다. "어디서 왔나."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이런 질문을 받겠지, 싶었다. "동쪽 마을에서요.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러 왔습니다." 위병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낡은 여행용 옷, 등에 멘 작은 배낭, 그리고 아직 여물지 않은 얼굴선까지 훑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애송이가 혼자? 보호자는?"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없었다. 형은 마을에, 나는 여기. 정확히는 형도 이 사실을 모르니 있으나 마나 한 보호자였다. 위병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통과시켰다. "길드는 저쪽 광장 지나서 왼쪽이다. 사고 치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성문을 넘는 순간, 나는 다시 결심을 곱씹었다. 2년 반. 남은 시간은 이제 그보다 조금 적었다. 그 시간 안에 뭔가를 이루지 못하면, 형도, 나도, 이 책도 전부 의미 없어질 것이다. 어머니의 책과 형의 안전, 그 두 가지를 손에 쥐고 나는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 안의 공기는 숲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 냄새, 향신료 냄새,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다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저 멀리 모험가 길드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간판 아래로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심상치 않게 길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나는 배낭끈을 고쳐 매고 그 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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