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매일 자정, 용사가 된다

2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의 무늬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건 언제부터였을까.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 나는 이미 침대에 앉아 어젯밤 창밖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그 시선을 곱씹고 있었다. 분명 사람의 형체였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꿈이었나. 아니면 이 세계엔 밤마다 창밖을 서성이는 취미를 가진 놈이 있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이불을 걷어차려는 찰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은쟁반을 든 소녀가 들어왔다. 밝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용사님, 기침하셨군요.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는 동작이 어딘가 손에 익어 보였다. 그릇의 위치, 수저를 놓는 각도, 냅킨을 접는 방식까지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사람이 나를 아는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소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서은아입니다, 용사님. 어제도 여쭤보셨는데요." 그 한마디가 가슴 한복판을 서늘하게 관통했다. '어제도 물어봤다고.' 나는 스푼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애써 태연한 척 되물었다. "내가 그랬나. 요즘 기억이 좀 오락가락해서 말이야." 서은아는 그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용사님께서는 요즘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실 거예요." 그 대답이 어딘가 지나치게 익숙한 것 같아서, 나는 스푼을 내려놓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그녀의 목소리엔 억양의 오차조차 없었다. "자네, 혹시 나에 대해서 아는 거 다 말해줄 수 있나? 진지하게 부탁하는 거야." 서은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 걷었다.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지자 그녀의 옆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났는데, 그 표정에는 어딘가 익숙한 슬픔 같은 것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정보가 먼저다. "용사님은 여드레 전, 마왕을 무찌른 뒤 이 저택에서 지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용사님을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고요." 그녀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꼬집으며 그 말들을 하나씩 소화하려 애썼다. '그 정도 시간이나 여기 있었다고. 근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다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마왕을 무찔렀다는 게 진짜라면 이 몸뚱이는 어디선가 검이라도 휘둘러본 적이 있어야 할 텐데, 손바닥에는 굳은살 하나 잡히지 않았다. '영웅치고는 손이 너무 곱군.' "그럼 마왕은 어떻게 무찔렀는지, 자네도 아나?" 내가 넌지시 묻자 서은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전투를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용사님께서 마왕성에서 홀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홀로?" "네. 함께 떠난 동료들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그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걸까. "그럼 오늘은 무얼 해야 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물으며 화제를 돌리자, 서은아는 다시 그 사무적인 어조로 답했다. "오전에는 자치회장님과 약속이 있으십니다. 정오에는 광장에서 주민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고요." 그녀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딘가 기계처럼 반복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나는 그 어조가 오히려 마음을 놓게 만든다는 걸 깨닫고 픽 웃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나를 속이려는 것 같지는 않군. 속이려는 놈이었다면 저렇게 딱딱하게 말하진 않겠지.' 그런 판단을 내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 사라진 동료들, 매일 반복되는 질문, 그리고 어젯밤 창밖의 시선. 조각들은 있는데 그림이 맞춰지지 않았다. 오전 일정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은아에게 저택 구조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순순히 설명해주었다. 저택은 3층 규모로 지어졌고, 1층에는 응접실과 식당, 2층에는 침실과 서재, 3층에는 훈련실이 있다고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녀가 손끝으로 방향을 가리킬 때마다, 나는 그 손짓 하나에도 반년치의 습관이 배어 있다는 걸 느꼈다. "용사님께서 매일 아침 서재에 들르시곤 했는데요." 그 말에 나는 곧바로 물었다. "서재에 뭐가 있길래?" 서은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용사님께서 직접 쓰신 기록들이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적으셨던 걸로 압니다." "매일? 그럼 그 기록, 나도 좀 봐야겠는데." 서은아는 별다른 제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매일 적은 기록이라면, 어제의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아니, 몰랐던 게 아니라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랐던 게 아닐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내가 뭔가를 남겨놨다고.' 나는 서재로 곧장 걸음을 옮겼고, 낡은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노트를 발견했다. 서재는 좁았지만 벽 한 면이 온통 책으로 채워져 있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먼지 낀 공기 사이로 흐릿한 기둥을 만들고 있었다. 표지에는 손글씨로 '기록'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는데, 그 필체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주어서 나는 조심스레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날짜 대신 '몇 번째 날'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짤막한 문장들이 이어졌다. '오늘도 자정이 되면 돌아간다. 서은아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몸에는 어제 생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노트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같은 문장이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역시 안 통했다.' '이번엔 다른 방법을 써봤다.' '결국 자정이 되면 원점이다.' 숫자는 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백 번이 넘도록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지금 이 몸의 주인도, 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 몸에 들어온 존재였던 걸까. "용사님?" 서은아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노트를 덮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노트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았지만, 속으로는 방금 읽은 문장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자정이 되면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몸에 상처가 그대로 남는다는 건 또 무슨 의미고.' 서은아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왔다. "오전 일정이 곧 시작됩니다. 준비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슬쩍 소매 안쪽으로 감췄다. 이건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자치회장과의 만남도, 광장에서의 인사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누군가는 눈물까지 훔치며 감사를 전했지만, 나는 그 모든 환대 속에서도 노트에 적힌 문장들만 되풀이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나를 영웅으로 알고 있지만, 정작 나는 이 영웅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런 아이러니를 곱씹으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한 채 노트에 적힌 문장을 곱씹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자정을 향해 초침을 옮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는데,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설마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노트에 적힌 백여 번의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오늘 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도망칠 곳도, 막을 방법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계가 정확히 열두 번을 울렸고, 그 마지막 종소리가 끝나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지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천장에 새겨진 금빛 문양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분명 내가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던 바로 그 아침의 풍경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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