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매일 자정, 용사가 된다

5화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저택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천장의 금빛 문양이 어김없이 눈에 들어왔다. 곡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넝쿨 무늬, 그 끝에 매달린 작은 별 모양 장식들까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또 되돌아온 건가.'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이제는 우습게 느껴졌다. 게임이었다면 세이브 포인트라고 좋아했을 텐데, 이건 그런 낭만적인 반복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어깨에서 익숙한 통증이 다시 치밀어 올라서 나는 숨을 삼켰다. 마치 누가 뜨겁게 달군 못을 살 속에 천천히 박아넣는 듯한 감각이었다. 팔을 걷어 올려보니 상위종에게 긁혔던 그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조금 더 벌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상처 가장자리가 거뭇하게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나는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뗐다. '노트에 적힌 대로군. 상처는 그대로 쌓인다는 거.'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반복되는 이 하루가 결코 안전한 리셋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루가 지나면 어깨는 조금씩 썩어가고, 언젠가는 그 썩음이 몸 전체로 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스치자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걱정해봐야 뭐가 달라지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이불을 걷어냈다. 서은아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을 때,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쟁반 위에는 갓 구운 빵과 우유, 그리고 얇게 썬 사과 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향이 방 안에 퍼지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날아들었다. "용사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녀가 놀란 얼굴로 다가와 어깨를 살피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서은아의 손끝이 이불자락에 닿기 직전이었다. "괜찮아, 그냥 잠을 잘못 잤어." 거짓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진짜 걱정을 읽어냈고, 그 걱정이 매번 처음처럼 새롭게 반복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나를 몇 번이나 걱정했을까. 근데 그걸 기억도 못 하는군.' 서은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혹시 상처가 벌어지신 거라면 제가 약초를 다시 가져올까요? 지난번에 쓰던 게 아직 남아 있을 텐데요." 지난번이라니. 그녀에게는 지난번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나에게는 그저 오늘의 다른 형태로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정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전이 되자 나는 서재로 가서 노트를 다시 펼쳤다. 서재는 늘 그렇듯 오래된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은은하게 뒤섞여 있었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책상 위에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젯밤, 아니 정확히는 방금 지나간 하루에 겪었던 상위종과의 전투와 하얀 공간에서 본 네 명의 형체에 대해 적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펜을 쥐고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는데, 손끝이 떨려서 글씨가 평소보다 삐뚤빼뚤했다. 전투의 순서, 상위종이 휘두른 발톱의 궤적, 하얀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그 이질적인 냉기까지 하나씩 적어나가던 중, 문득 이전 장들을 넘겨보다가 낯익은 이름 네 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걸 발견했다. '강태림, 윤서화, 백승우, 하은채.' 어느 장에서는 짧게 한 줄, 어느 장에서는 몇 줄에 걸쳐 그 이름들이 적혀 있었는데, 필체가 매번 조금씩 다른 걸 보면 내가 그때마다 다른 감정으로 이 이름들을 적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 이름들을 소리 없이 되뇌는 순간, 하얀 공간에서 본 네 형체의 얼굴이 그 이름과 겹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펜을 쥔 손을 멈추었다. 형체들은 얼굴이 흐릿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검을 쥔 자세, 지팡이를 짚은 손짓, 활을 겨누는 어깨선까지, 마치 오래전에 함께한 사람들의 잔상 같았다. "용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서은아의 목소리에 나는 노트를 서둘러 덮고 응접실로 향했다. 노트를 덮는 손이 조금 급했던 탓에 종이 몇 장이 구겨졌지만, 그걸 다시 펴볼 여유는 없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볕에 그은 얼굴에 소박한 옷차림을 한 중년 남자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옷깃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 농사를 지은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보였다. "용사님, 오늘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내려놓았는데, 바구니 안에는 붉은 사과와 노란 배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못 한 채 애매하게 웃었다. "자네는 누구지?" 내가 그렇게 묻자 남자는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눈썹이 살짝 처지고 입가가 굳는, 서운함이 얼굴 전체로 퍼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저는 김판수입니다. 마을 어귀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이지요. 용사님께서 늘 제 사과를 좋아하셨는데, 오늘은 잊으셨나 봅니다." 그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이 사람을 처음 보는데, 이 사람은 나를 여러 번 만난 것처럼 말하는군.' 이런 식으로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이 나에 대한 기억을 쌓아가고 있을 텐데, 나만 매번 백지 상태로 그들을 마주한다는 게 새삼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웃으며 사과를 하나 집어 들었고, 김판수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풀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용사님, 지난번에 하셨던 말씀 기억나십니까? 마을 사람들 몰래 강 하류 쪽을 살펴보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를 낮추는 순간, 나는 사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되물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사과 껍질에 손톱이 살짝 박혀서 옅은 자국이 남았다. 김판수는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한 걸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접실에는 우리 둘뿐이었는데도 그는 마치 벽에 귀가 달려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용사님께서 예전에 함께 여행하셨던 동료분들, 강태림 검사님이랑 윤서화 왕녀님, 백승우 마법사님, 하은채 궁수님 말입니다. 그분들에 대해 뭔가 알아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강 하류 쪽에 그분들이 마지막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그 이름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노트에 적혀 있던 이름들과 하얀 공간에서 본 네 형체가 완전히 겹쳐지는 걸 느끼며 숨이 턱 막혔다. 검사, 왕녀, 마법사, 궁수라는 직함까지 붙으니 하얀 공간의 실루엣들이 갑자기 뚜렷한 사람의 형태로 변하는 것 같았다. '검을 쥔 자세는 강태림이었나. 지팡이를 짚은 손짓은 백승우였고.' "그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지?" 내가 그렇게 묻자 김판수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는 바구니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잠깐 바닥으로 내렸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용사님, 벌써 여드레나 지난 일입니다. 그분들은… 마왕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모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귓가에 박히는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놓칠 뻔했다. 손가락 사이로 사과가 미끄러지는 감각까지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나는 그것을 다시 움켜쥐었다. '돌아가셨다니. 그럼 나는 그때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노트에는 그 전투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여드레라는 시간이면 그 전투가 있었던 날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하루가 반복되었을 텐데, 그중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적어두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끼쳤다. 김판수가 돌아간 뒤, 나는 서재로 돌아가 노트를 다시 처음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이 점점 빨라졌고, 몇 번은 페이지를 너무 세게 넘겨서 종이 끝이 살짝 찢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넘겨봐도 마왕과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었고, 그저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대한 단편적인 문장들만 남아 있었다. '오늘도 상위종을 만났다.' '서은아가 또 사과를 가져왔다.' '자정에 하얀 공간을 봤다.' 그런 식의 짧은 기록들이 반복되고 반복되었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할 것 같은 그 전투에 대해서는 침묵뿐이었다. '내가 일부러 안 쓴 건가, 아니면 못 쓴 건가.' 그런 의문이 들며 마지막 장을 넘긴 순간, 종이 끝자락에 급하게 휘갈긴 듯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문장들보다 필압이 훨씬 강해서 종이가 살짝 눌려 있었고, 글씨체도 평소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 '자정이 반복될수록, 하얀 공간의 형체가 점점 또렷해진다. 그들이 뭔가 말하려 한다. 다음엔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 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서재 안의 온기는 그대로였는데, 유독 손끝만이 마치 겨울 강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시렸다. '반드시 들어야 한다니. 지난 나는 대체 뭘 듣다가 실패했던 걸까.' 노트를 덮고서도 나는 한동안 그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창밖의 노을이 붉게 번지는 걸 보며 다가올 자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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