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천장의 금빛 문양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나는 이것이 반복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문양의 굴곡, 그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의 각도까지 어제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나는 잠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노트에 적힌 그대로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어제와 똑같이 문이 열리고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갑옷의 이음새가 부딪치는 소리,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 울리는 그 둔탁한 소리마저 익숙해서, 나는 이 세계가 나를 상대로 정교한 연극을 반복 상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용사님, 기침하셨습니까." 그 말투마저 똑같아서 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옷깃에 어제와 다른 얼룩 하나가 있는 걸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다. 어제는 왼쪽 소매 끝에 작은 흙 얼룩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것이 사라지고 대신 오른쪽 옷깃에 갈색 얼룩이 새로 생겨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게 아니야. 미묘하게 다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팔을 들어 살펴보았고, 어제 노트에서 읽었던 문장대로 손등에 작은 상처 하나가 남아 있는 걸 확인했다. 상처의 위치, 딱지의 크기, 심지어 그 주변 피부의 붉은 기운까지 노트에 적힌 묘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쯤 되면 이건 반복이 아니라 아예 정해진 각본이라 부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은아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을 때, 나는 이번에는 곧바로 물었다. "자네, 이름이 서은아 맞지?" 쟁반 위에는 갓 구운 빵과 뜨거운 김이 오르는 수프가 담겨 있었는데, 그 냄새조차 어제와 완전히 동일해서 나는 잠깐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늘 처음 뵙는 건데요." 그 대답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저 사람은 이 반복을 기억 못 하는군.' 그런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어제 만났던 것 같아서 말이야." 서은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다시 그 익숙한 사무적인 어조로 아침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는 자치회장님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후에는 방벽 지역 시찰이 있고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노트에 적혀 있던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오전 일정 중, 자치회장 박정호와의 만남이 있었다. 안경을 쓴 노년의 남자가 서류를 든 채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의 서류철은 두께가 상당해서, 저 안에 얼마나 많은 마을의 골칫거리가 쌓여 있을지 짐작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용사님, 지난번 약속하신 대로 마을 외곽 방벽 보수 일정을 확정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박정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담담하게 답했다. "열흘 전, 마을 회관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병사들을 데려가 방벽 지형을 살펴보시겠다고요." 그 사무적인 말투는 서은아와 놀랍도록 비슷했는데, 이 세계 사람들이 다들 이런 말투를 배우는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가 싶은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열흘 전이라니, 나는 여기 있었던 게 며칠 안 되는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노트에 적힌 문장들을 떠올리며 이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짐작했다. 노트는 분명 오늘 이 순간까지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 기록에 따르면 열흘 전이라는 시간은 실제로 존재했다. 다만 내 체감상의 시간과 이 세계의 시간이 어긋나 있을 뿐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 가지."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박정호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병사들은 이미 대기 중입니다." 그 표정에서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동시에 그 신뢰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도 알아차렸다. 이 사람은 내가 이미 몇 번이나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오직 열흘 전의 약속 하나만을 붙잡고 나를 믿고 있는 셈이었다. 그 순진함이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짐처럼 무겁기도 했다.
마을 외곽으로 향하는 길, 나는 서은아와 병사 몇 명을 대동한 채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 위를 구르는 소리, 그 진동이 엉덩이 밑에서부터 등줄기까지 전해지는 감각이 이상하게도 정겨웠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돌집과 밀밭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었는데,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낮게 깔린 지붕들, 그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밀밭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마왕이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걸 믿기 힘들 만큼 이 세계는 지나치게 목가적이었다. '이런 세계에 정말 마왕이 있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서은아가 조심스레 건넨 말에 정신을 차렸다. "용사님, 방벽 근처는 요즘 마물들의 출현이 잦아졌다고 합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이 진심처럼 느껴져서, 나는 순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걱정 말게, 내가 좀 튼튼하잖나." 나는 웃으며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그 튼튼함이라는 게 정말로 검을 다뤄본 적 없는 몸뚱이에 얼마나 통할지 자신이 없었다.
병사들은 마차 옆을 나란히 걸으며 창을 든 손을 긴장한 듯 꽉 쥐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이 지역이 이미 몇 번이나 습격을 당한 적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은아는 그런 병사들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지난 습격 때는 병사 두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마물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서, 자치회에서도 걱정이 많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노트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던가 되짚어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반복에서 처음 듣는 정보일 수도 있었다.
마차가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말들이 히잉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마부가 당황한 목소리로 뭔가 외치는 순간, 숲 양옆에서 검은 형체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는데,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피부가 회색빛으로 죽어 있고 눈이 붉게 빛나는,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 숫자가 열은 되어 보였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그들의 회색 피부가 마치 젖은 회벽처럼 번들거렸다. "마물입니다!" 병사 하나가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고,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마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싸울 줄이나 아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이 스치는 사이, 가장 가까운 마물이 손톱을 세우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옆에 서 있던 병사의 검을 낚아채 들었는데, 손에 익은 무게감이 오히려 낯설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몸이 먼저 움직이며 마물의 팔을 베어냈다. 검붉은 액체가 튀어 오르며 마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뒤편에서 또 다른 마물이 서은아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 몸이 정말로 검을 다뤄본 몸인지, 아니면 그저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축적된 반복의 결과인지 헷갈렸지만, 그런 의문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위험해!" 나는 외마디를 지르며 몸을 던져 서은아를 밀쳐냈는데, 그 순간 마물의 손톱이 내 어깨를 깊게 긋고 지나갔고, 뜨거운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피가 옷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서늘하도록 선명했고, 그 선명함이 오히려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이 또렷해졌다.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마물들을 막아내는 사이, 나는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누르며 서은아를 부축해 마차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붙잡는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 이 상황에서도 그녀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용사님,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켜 검을 쥐었다. 병사 하나가 마물의 목을 베어내며 짧게 신음을 흘렸고, 또 다른 병사는 창으로 마물의 가슴을 관통시키며 뒤로 넘어졌는데, 그 모든 광경이 하나의 흐름처럼 눈앞에서 뒤섞였다. 나는 다시 검을 고쳐 쥐고 가까이 다가오는 마물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 감각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몸은 이미 그 낯섦을 넘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숲 깊은 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시야 끝에 걸려들었는데, 그 형체가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병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게 느껴졌다. 나뭇가지들이 그 거대한 몸통에 부딪혀 부러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고,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마저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병사 한 명은 검을 쥔 손을 떨며 뒷걸음질 쳤고, 다른 병사는 아예 신음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저건 또 뭐지.' 나는 어깨의 통증을 잊은 채, 그 거대한 형체가 나무들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 그림자의 윤곽선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