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곱 살, 악당을 삽니다

1화

오후 11시 47분. 휴대폰 화면에 금이 가 있었다. 어제 편의점 앞에서 떨어뜨린 자국이었다. 그때는 액정 하나 깨진 걸로 화가 났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액정 속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잔액: 130원]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당연했다. 숫자는 내가 눈을 감았다 뜬다고 늘어나는 게 아니었다. 대출 3,800만 원. 연이자 24퍼센트. 연체 47일째. 세 개의 숫자를 순서대로 다시 읽었다. 3,800만 원. 24퍼센트. 47일. 세 번째 숫자를 읽을 때 목이 탔다. 처음엔 500만 원이었다. 한소미 등록금이 부족하다고 해서 빌려준 돈이었다. 그다음엔 900만 원이었다. 한소미 어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보탠 돈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세지 않았다. 세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정확히 알게 될 것 같아서였다. 세 번째로 확인해도 같았다. 부정할수록 선명해지는 숫자였다. [오빠 미안해.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한소미의 메시지는 두 달 전이었다. 그 메시지를 받은 날, 나는 사무실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삼십 분 동안 나오지 않았다. 동료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네, 배가 좀 안 좋아서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진짜 아픈 곳은 배가 아니었는데. 그다음 사진이 왔다. 몰디브 해변, 파란 물, 웃는 얼굴. 옆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유정훈. 한소미가 소개해준 적 있는 회사 동료였다. 셋이서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그때 유정훈은 내게 형이라고 부르며 술을 따라줬었다. 그 손으로 지금 한소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 밑에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빠가 빌려준 돈 잘 쓰고 있어ㅋㅋ] 웃으라고 쓴 말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웃음이 났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웃음이 나오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반대여야 정상인데,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받지 않았다. 액정 위로 진동이 세 번 울리고 끊겼다. 십 초쯤 지나 다시 울렸다. 또 받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받아도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안 받아도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세 번째로 울렸을 때 받았다. "이자 밀린 거 아시죠."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사무적이었다. 내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냥 채무자, 라는 단어로 취급하는 듯한 말투였다. "압니다." "내일까지 못 넣으면 저희도 방법이 없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물아홉 먹은 남자가 이런 목소리를 낸다는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이번 달만 세 번째 하시는 말씀이네요." 숨이 막혔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지난 두 번도 똑같이 애원했고, 두 번 다 지키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화면을 보니 통화 시간이 47초였다. 연체 47일과 겹치는 숫자라는 게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의미 없는 우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건물 옥상 난간에 손을 짚었다. 회사 근처 오피스텔 옥상이었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올라올 수 있는 곳이라서, 요즘 자주 왔다. 바람이 찼다. 손끝이 저렸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물아홉. 대출. 배신.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맞물려 돌았다. 다른 생각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 얼굴도, 어릴 때 기억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저 세 단어만 반복해서 돌아갔다. 스물아홉, 대출, 배신. 스물아홉, 대출, 배신. 세 번째로 돌 때는 그 세 단어가 하나의 문장처럼 들렸다. 너는 실패했다, 라는 문장으로. 난간 위로 한쪽 발을 올렸다. 신발 밑창이 차가운 콘크리트에 닿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뛰면 손실 확정이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사람 목소리였는데, 형체가 없었다. 어둠이 조금 더 짙게 뭉쳐 있는 자리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게, 소리는 있는데 그림자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무섭지가 않았다. 무서워야 하는데 무섭지 않았다. "누구야." "매수자." "뭐?" "네 인생, 살까 하고." 목소리는 담담했다. 감정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마치 시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증권사 직원이 종목을 부르는 톤이었다.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지금 네 인생은 상장폐지 직전이거든." "..." "이대로 뛰어내리면 청산가 0원. 근데 나랑 거래하면, 새 계좌를 줄게." 손이 떨렸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난간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가 했다. "무슨 거래." "새로운 삶. 원하는 거 다 갖게 해줄게. 돈, 힘, 복수." "대가는." "청구서는 나중에 갈 거야." 나는 되물었다. "얼마나 나중에." "네가 잊을 만큼." 말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놓이면 안 되는데 놓였다. 빚 3,800만 원에는 이자와 날짜가 정확히 붙어 있는데, 이 목소리가 말하는 청구서에는 아무 숫자도 없었다. 숫자가 없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싫다고 하면." "그럼 지금처럼 뛰어. 말리진 않아." 목소리는 정말로 붙잡지 않았다. 설득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팔 사람은 팔고 안 살 사람은 안 사면 그만이라는, 그런 태도였다. 아래를 다시 봤다. 도로가 아까보다 더 멀어 보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발은 난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한소미의 웃는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유정훈의 손이 한소미의 어깨를 감싼 사진도 스쳤다. [오빠가 빌려준 돈 잘 쓰고 있어ㅋㅋ] 그 문장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손이 차가워졌다. 이가 갈렸다. "계약하면, 그놈들 무릎 꿇릴 수 있어?" "그놈들만? 세상 전부를 무릎 꿇릴 수 있어. 네가 원하면." 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침을 삼켜도 마름이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조건이 뭔데." "조건은 없어. 대가만 있어." "대가가 뭔데." "그건 겪어봐야 알아. 원래 그런 거잖아, 투자란 게." 그 말이 이상하게 설득력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투자도 결과를 보기 전엔 몰랐으니까. 한소미에게 돈을 빌려줄 때도, 이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르고 빌려줬으니까.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왜 웃는지 알았다. 미친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보다 나쁠 수는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다. "할게."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하얘졌다. 소리도, 냄새도, 감각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발밑의 콘크리트도, 손끝의 저림도, 목의 마름도 전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한마디를 남겼다. "계약 체결. 대가는, 청구서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잃는지도 모른 채. 휴대폰 액정에 떠 있던 130원이라는 숫자도, 3,800만 원이라는 빚도, 47일이라는 연체일도 함께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두 번 다시 그 옥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것만은 분명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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