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새벽 5시.
연습장 흙바닥이 차가웠다.
발가락 끝으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곽태산이 목검을 던져줬다.
"오늘도 하겠다는 겁니까, 아가씨."
은퇴한 기사였다.
한때 왕국 최고의 검술 지도관이었다고, 소녀의 기억이 말해주었다.
전장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기억도 섞여 있었다.
지금은 늙은 몸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만.
"네."
짧게 대답했다.
첫날, 목검을 제대로 쥐는 것부터 실패했다.
손목이 꺾였다.
검이 땅에 떨어졌다.
쨍, 소리가 났다.
곽태산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 근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일곱 살짜리 몸에 무슨 검술을, 이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둘째 날도 비슷했다.
손목이 꺾이고, 검이 떨어졌다.
셋째 날도 비슷했다.
넷째 날, 다섯째 날.
매번 똑같이 검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검술은 처음이지만, 물리와 역학은 낯설지 않았다.
무게중심, 회전력, 타이밍.
숫자로 계산하듯 몸의 움직임을 쪼갰다.
손목의 각도를 15도씩 조정해봤다.
발의 위치를 반보씩 옮겨봤다.
검을 쥐는 손가락 힘을 3할, 5할, 7할로 나눠 시험했다.
일주일.
검이 떨어지는 횟수가 줄었다.
이주일.
목검을 쥔 채로 세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한 달.
목검을 쥔 채로 곽태산의 동작을 따라 할 수 있었다.
한 달째, 처음으로 목검이 곽태산의 팔을 스쳤다.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가벼운 소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크게 들렸다.
곽태산이 눈을 크게 떴다.
"...다시."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체념이 섞였던 톤에서, 뭔가를 확인하려는 톤으로.
그날부터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절망하던 얼굴에서, 조금씩 흥미가 섞인 얼굴로.
가끔은 대련 중에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 나이에... 이 속도로..."
오전 9시.
학문 수업.
한익서가 영지 경영 장부를 펼쳤다.
낡은 가죽 표지에 손끝이 닿는 소리가 났다.
"이건 지난해 영지의 세수 내역입니다. 문제점을 찾아보십시오."
일곱 살 아이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숫자가 빽빽하게 나열된 장부는 성인도 한눈에 읽기 힘든 자료였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 회사에서 재무제표를 들여다본 경험이 있었다.
매출표, 손익계산서, 그런 것들을 붙잡고 밤새 씨름했던 기억이 있었다.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수 320만 골드.
지출 298만 골드.
순이익 22만 골드.
한 줄씩 훑었다.
곡물, 직물, 목재, 광물.
항목별로 전년 대비 증감률을 속으로 계산했다.
"여기, 곡물 수입 항목이 이상해요."
손끝으로 짚었다.
"작년보다 30퍼센트 늘었는데, 실제 인구 증가율은 5퍼센트도 안 돼요. 중간에서 누가 빼돌리고 있는 거 같아요."
한익서가 안경을 고쳐 썼다.
장부를 다시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재확인했다.
"...정확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실렸다.
평소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가씨, 이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전생에 회계를 공부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숫자가 이상해서요."
한익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부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그러다 낮게 중얼거렸다.
"천재."
그 말이 허공에 떠 있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공작에게 그 이야기가 전해졌다.
"설이가 재무 부정을 잡아냈다고요?"
"네, 공작님. 관리인 중 한 명이 실제로 곡물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규모는."
"석 달간 대략 12만 골드로 추정됩니다."
공작의 눈에 놀라움과 자부심이 뒤섞였다.
"내 딸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 속에 여러 감정이 지나간 걸 알 수 있었다.
두 달, 세 달.
시간이 지날수록 성과가 쌓였다.
검술은 이제 곽태산과 겨루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물론 아직 완패였지만, 그가 힘을 다해야 하는 상대가 됐다.
그가 목검을 휘두를 때 진짜 힘을 담기 시작했다는 걸, 손목에 전해지는 충격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속도는..."
곽태산이 목검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가 본 재능 중 최고입니다."
그의 눈에 절망 대신 열정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는 시선을 피하던 그가, 이제는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학문 쪽도 마찬가지였다.
영지 운영에 관한 제안서를 직접 써서 올렸다.
세율 조정, 유통망 재편, 부패 관리 적발 체계.
서른두 장짜리 문서였다.
필체는 아직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한익서는 그 제안서를 들고 공작을 찾아갔다.
"이건 성인 영주도 못할 수준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문 너머까지 들렸다.
공작은 그 말을 듣고 내게 물었다.
"설아, 이걸 정말 네가 다 생각한 거니."
"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순간 말이 막혔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무릎 꿇리기 위해서라고, 복수를 위해서라고, 어떻게 말할까.
차라리 검을 백 번 더 놓치는 게 쉬웠다.
"...가문을 위해서요."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이상하게 서늘해졌다.
칭찬받아야 할 자리에서,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감각만 남았다.
"그래. 정말 훌륭하다."
그는 내 어깨를 잡고 한동안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존경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손끝이 어깨에 닿는 느낌이 낯설었다.
따뜻했다.
그런데 그 온도가 나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집사 김도율도, 스승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내 노력을, 고결한 헌신으로 오해했다.
실제로는 복수를 위한 도구를 갈고 있을 뿐인데.
"아가씨는 정말 남다르십니다."
김도율이 차를 내오며 그렇게 말했을 때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오해가 쌓일수록, 나는 더 많은 자원을 얻었다.
더 좋은 스승, 더 많은 책, 더 넓은 권한.
서재의 책이 늘어났다.
훈련 시간이 길어졌다.
공작이 직접 결재하는 서류에 내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였다.
원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곽태산과 대련하다가 목검이 손등을 스쳤다.
살짝 찢어졌다.
피가 났다.
붉은 줄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 않았다.
피를 보고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그 정도 상처에도 놀랐을 텐데.
지금은 그냥, 관찰하듯 상처를 바라봤다.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고, 지혈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그게 끝이었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곽태산이 급하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손등을 감쌌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목소리가 너무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나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훈련으로 단련된 거라고, 그렇게 넘겼다.
몸이 강해지면 통증에도 무뎌지는 거라고, 그렇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였을까.
진심으로, 계산 없이 웃은 게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진짜 화를 낸 게 언제였을까.
누군가에게 서운하다고 말한 게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봤다.
전생의 기억은 선명했다.
회사, 손절, 계좌 잔고, 그 모든 숫자들.
그런데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려 하면, 그 자리에 텅 빈 공간만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웃었을 텐데.
분명히 울었을 텐데.
그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의 나뭇결을 눈으로 따라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곽태산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을 때, 나는 뭘 느꼈나.
한익서가 나를 천재라고 불렀을 때, 나는 뭘 느꼈나.
공작이 내 어깨를 잡고 존경의 눈빛을 보냈을 때, 나는 뭘 느꼈나.
기뻤어야 했다.
자랑스러웠어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엔 그저, 다음 계획에 대한 계산만 있었다.
검술 훈련 시간을 늘릴 것.
장부를 하나 더 검토할 것.
공작의 신뢰를 몇 퍼센트 더 확보할 것.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숫자만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청구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심장이 얼어붙었다.
숨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목소리였다.
계약을 맺던 그날의 목소리.
창밖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만은, 분명히 방 안에 있는 것처럼 가까웠다.
목이 말랐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오랜만이지, 아가씨."
그 말투.
그 여유로운 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