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오랜만이네."
목소리는 방 안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어둠 속, 형체가 없었다.
촛불 하나 켜두지 않은 방이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만이 침대 위를 비추고 있었다.
"너."
"나. 기억하네, 다행이다."
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이불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더라.
계약을 맺던 그날, 그 어둠 속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음색이었다.
"청구서라니, 뭘 말하는 거야."
"네가 얻은 만큼, 뭔가는 나갔어. 시장 원리잖아. 공짜는 없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시장 원리.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수익이 난 자리엔 반드시 손실을 본 누군가가 있었다.
제로섬.
이 세계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걸까.
"뭘 잃었는데."
"그건 네가 직접 찾아야 재미있지."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나는 항상 진지해."
대답 없이 사라진 목소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계 소리만 째깍거렸다.
새벽 3시.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다.
내가 얻은 건 뭐였을까.
이 몸, 이 신분, 이 기억.
그럼 잃은 건.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새벽 수련장으로 나갔다.
곽태산과 목검을 맞대고 땀을 흘렸다.
칼끝이 어깨를 스칠 때도, 손목이 꺾일 때도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그냥 몸을 움직이는 훈련일 뿐이었다.
오전엔 학문 수업을 들었다.
역사서를 읽고, 지도를 외웠다.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를 지나갔지만 머릿속엔 다른 게 있었다.
잃은 게 뭘까.
계속 그 질문이 맴돌았다.
점심을 먹을 때도 수저를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추곤 했다.
시녀가 "괜찮으세요, 영애님?" 하고 물었을 때야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뭔가 놓친 게 있다는 감각이 자꾸 뒷목을 잡아당겼다.
오후 3시.
공작이 나를 불렀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작은 서류 뭉치를 정리하다 고개를 들었다.
"오늘 시내에 나갈 일이 있다. 상단 몇 곳을 살펴봐야 해서. 너도 같이 가겠니."
영지 경영을 배우는 차원에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네, 아버지."
"준비해라.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
방으로 돌아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시녀가 머리를 정리해주는 동안 창밖을 봤다.
하늘이 흐렸다.
마차를 타고 도시로 나갔다.
바퀴 소리가 자갈길 위에서 규칙적으로 울렸다.
창밖으로 번화가가 지나갔다.
상점 간판, 오가는 사람들, 마차와 노점상들이 뒤섞인 거리였다.
전생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익숙했다.
바쁘고, 지치고, 무표정한.
마차가 번화가를 지나, 상단 구역에 들어섰다.
건물들이 점점 커지고, 간판들도 화려해졌다.
그중 한 건물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백가 상단 - 노예 경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글씨로 쓰인 그 간판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노예 상단이에요?"
"영지 재정 문제로, 노동력 조달 계약이 걸려 있다. 확인할 게 있어서 들르는 거다."
공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이게 그냥 일상적인 업무였다.
마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땀과 먼지, 그리고 뭔지 모를 비린 냄새.
넓은 홀에 쇠창살로 된 우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일렬로, 마치 상품 진열대처럼.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 여자, 아이들.
몇몇은 바닥에 웅크려 앉아 있었고, 몇몇은 그냥 서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눈빛에 생기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뭔가를 상기시켰다.
인신매매, 노예제, 인권.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경보처럼 울렸다.
하지만 소녀의 기억 속에서는, 이건 그냥 이 세계의 일상이었다.
두 기억이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아무렇지 않게 홀 안을 걷고 있었다.
공작은 상단주와 대화를 나누러 갔다.
두 사람은 서류를 펼쳐놓고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계약서, 인원 수, 금액.
숫자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홀 안을 걸었다.
우리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몇몇은 애원하듯 손을 뻗었고, 몇몇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한 우리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은발의 소녀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일곱, 여덟 살쯤.
온몸에 상처가 있었다.
팔뚝에 남은 채찍 자국, 다리에 든 멍, 뺨에 남은 긁힌 상처.
옷은 다 낡아서 헐렁했고,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그런데도 눈빛만은 흐려지지 않았다.
그 눈이 나를 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뭔가가 가슴을 쳤다.
쿵.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절망도, 원망도,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 담긴 눈.
"이름이 뭐야."
한참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백소라."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 같은 소리였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몰라."
"가족은."
"없어."
짧은 대답들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느껴진다는 게, 이상했다.
곽태산과 대련하다 피가 났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검이 팔을 후려칠 때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릴 때도, 그냥 관찰하듯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녀를 보고 있으니 뭔가가 움직였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 뻐근한 게 눌리는 감각.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분노인지, 동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상단 직원이 다가왔다.
체격이 좋고 얼굴에 웃음을 걸친 남자였다.
"영애님, 그 애는 상품 가치가 낮습니다. 다른 쪽을 보시겠어요? 저쪽에 더 상태 좋은 애들이 있습니다."
상품이라는 말에 손끝이 저렸다.
사람을 두고 상품이라 부르는 그 말투가,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이 아이는 어떤 사연이야."
"북부 마을에서 잡혀 온 애입니다. 마을이 통째로 무너졌는데, 얘만 살았죠. 그래서 반값입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치 물건의 하자를 설명하듯.
무너진 마을.
혼자 살아남은 아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뭔가가 가슴을 쳤다.
더 세게.
"저기."
돌아보니 공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단주와의 대화를 마친 모양이었다.
"설아, 뭘 그렇게 보고 있니."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작이 우리 안의 소녀를 봤다.
시선이 잠깐 소녀의 상처들을 훑고 지나갔다.
"...상태가 좋지 않구나."
"아버지."
"응."
말이 목에 걸렸다.
사고 싶다고 말해야 하나.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악당이 되기로 했다.
세상을 짓밟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낯선 소녀 하나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이런 식으로 흔들려본 적이 없었다.
그게 이상했다.
이상해서 더 신경이 쓰였다.
말을 하려다 다시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그렇게 말했다.
공작은 더 묻지 않고 다시 상단주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다시 우리 앞으로 갔다.
백소라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
소녀가 처음으로 먼저 물었다.
목소리에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찾았네."
숨이 멎었다.
몸이 굳었다.
주변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뭘."
"네가 잃은 거. 저기 있잖아."
소녀를 다시 봤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아이가 대체 어제 말한 청구서와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
"저 애가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없어. 저 애가 문제가 아니라, 저 애를 보고 네가 느끼는 게 문제야."
목소리는 계속됐다.
담담하고, 여전히 감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어조였다.
"넌 지금 뭔가를 느끼고 있어. 그게 낯설지 않아?"
순간 깨달았다.
곽태산의 대련에서 피를 봤을 때도, 상처를 봤을 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
그게 이상했던 이유.
방금 전까지도 그 이상함을 그냥 넘겼는데.
이제야 그 형태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낯선 소녀 앞에서만 뭔가가 움직인다.
가슴 한복판이 계속 뻐근했다.
이게 정상일까.
아니면, 이게 마지막 남은 조각일까.
목소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안에서 백소라의 눈이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눈 속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 나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공작이 상단주와 대화를 마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 아이를 그냥 지나쳐야 하는지, 아니면.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확신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 선택이 앞으로의 모든 걸 바꿀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