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함장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가끔 헛웃음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 어딘가의 편도 2차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좌회전 트럭에 치여 죽은 김서린이었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였다. 죽고 나서 눈을 뜬 곳이 대한연합함대 소속 전함 청단호의 정비 도크였고, 몸은 사람이 아니라 고위전술드로이드 '한별-392'였다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는—뭐, 그때의 당혹감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여기서 다시 곱씹지는 않기로 한다. 신체가 금속과 합금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고, 그 후로도 가끔씩 손끝의 감각 피드백이 인간의 것과 미묘하게 달라서 스스로 소름이 돋는 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소한 위화감을 곱씹을 여유조차 없었다. 요컨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함장으로서 지휘하는 이 전함이 지금 이 순간 은하제국군의 신형 클론병사군단에게 개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경고: 함선 전면부 장갑 43% 파손. 즉각적인 회피 기동을 권고합니다.]
계기판에 뜬 문구를 보자마자 나는 조타 드로이드를 향해 소리쳤다.
"우현 15도, 하강 각도 20! 저것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함장님, 저것들 기동력이 우리 표준 전투드로이드의 세 배는 됩니다"라고 조타 드로이드가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에 이미 패배를 인정하는 듣기 싫은 침착함이 섞여 있었다.
사실 그 침착함이 문제였다. 저가형 하급 드로이드들은 위기 상황에서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대신, 상황이 정말로 나쁠 때 목소리가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특성이 있었으니까—이 함선을 두 달 몰아본 나로서는 이제 그 신호를 읽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등골이 서늘해졌다. 처음 이 함선에 배속됐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미묘한 뉘앙스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이 조타 드로이드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이제는 억양 하나만 들어도 상황의 심각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목소리는—최악이었다.
콰아앙!!
측면 함체가 뭔가에 스치듯 얻어맞는 소리가 함내를 울렸고, 나는 그 진동을 함장석 팔걸이를 통해 그대로 전달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인간이었을 때는 이렇게 물리적인 충격을 촉각으로 고스란히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 드로이드 몸뚱이는 신경계와 함체가 일부 연동되어 있어서 함선이 맞으면 나도 함께 맞는 것 같은,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감각을 안겨줬다. 화면 한쪽에 떠 있는 함대 편성도를 보니 절반 가까운 아군 함선의 표시가 이미 회색으로 죽어 있었는데—죽었다는 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함선 하나하나에도 승무원 드로이드들이 타고 있었으니 결국 죽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회색으로 바뀐 점 하나하나가 몇 백 기의 드로이드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 화면은 그냥 통계 그래프가 아니라 학살의 기록이었다.
"함장님, 접니다"라는 목소리가 통신 채널에 끼어들었고, 나는 그게 도현-1193이라는 걸 목소리만으로 알아챘다. 고위항공전투드로이드, 함재기 부대 대대장, 3년 경력의 베테랑 파일럿—이 인간 아니 드로이드는 이 개판인 전황 속에서도 목소리 톤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도현과는 함내 회의 때 몇 번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건 이 녀석이 감정을 아예 안 갖고 태어난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만 철저하게 억누르는 타입이라는 거였다. 지금도 그랬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클론병사들 함재기가 우리 함재기 손실률의 4배를 냈습니다. 이대로면 함재기 부대 전멸까지 12분 남았습니다"
"12분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뽑은 거야"라고 물었지만, 사실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뭔가 시간을 벌고 싶어서 나온 질문이었다.
"현재 교전 비율을 단순 연장한 계산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그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더 부각시켰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함재기 부대가 12분 후에 전멸하고, 그다음엔 청단호가 무방비로 노출되고, 그다음엔—그다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결론은 뻔했다. 함재기 없는 전함은 근접전에서 그냥 커다란 표적일 뿐이었고, 클론병사군단의 함재기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12분 뒤에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드로이드 몸뚱이 어딘가에서 뭔가 삐걱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진짜 기계적 결함인지 아니면 그냥 내 심리 상태가 만들어낸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긴급: 함대 사령부와의 통신이 간섭으로 불안정합니다.]
'통신마저 이 지경이면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다는 소리인데'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함장석 팔걸이를 손톱 없는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초조하게 상황판을 훑었다. 저 클론병사군단이라는 건 이번 전쟁에서 제국군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 신무기라고 들었는데, 정보부의 사전 브리핑에는 '기동성 우위 확보 추정'이라는 애매한 문구만 있었을 뿐, 실제로 이 정도일 거라는 예측은 어디에도 없었다. 브리핑 자료를 준비한 정보부 놈들 얼굴을 지금 당장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감정을 곱씹을 시간조차 사치스러웠다.
"함장님, 3번 함대 궤멸 확인. 5번, 7번 함대도 이탈 중입니다"라고 통신 드로이드 하나가 다급하게 보고했고,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다. 이 드로이드는 원래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개체였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기질적인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오히려 상황의 무게를 더 실감나게 만들었다.
퍼억!!
또 한 번의 충격이 함체를 흔들었고, 나는 그 순간 함장석 계기판에 뜬 함체 내구도 수치가 두 자릿수로 떨어진 걸 확인했다. 몇 분 전만 해도 세 자릿수였던 숫자가 이렇게 순식간에 떨어지는 걸 보니, 이 함선의 남은 시간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요컨대 이대로 정면으로 버티는 건 산술적으로도 불가능했고,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순간 내려야 할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전 함대에 통보한다. 청단호는 독자 이탈, 비상 워프를 실시한다"라고 나는 통신망에 대고 외쳤고, 그 순간 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함장님, 워프 좌표 산출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실행하면 목표 미지정 무작위 워프가 됩니다"
"알아. 그래도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나아"라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게 맞는 판단인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무작위 워프라는 건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좌표 없이 워프 엔진을 강제로 돌리면 우주 어딘가의 임의의 지점으로 튕겨 나가는데, 그 지점이 항성 한복판일 수도 있고 블랙홀 근처일 수도 있었으니까—사실상 죽음을 다른 방식의 죽음으로 바꾸는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박을 택했는데, 적어도 무작위 워프는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존재했고,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확률조차 존재하지 않는 죽음이었으니까.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죽어서 드로이드로 다시 태어난 인생인데, 또다시 확률 게임을 하고 있다니.
"승무원 전원, 워프 대비 자세 취해"라고 나는 마지막으로 소리쳤고, 함내 조명이 붉게 바뀌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승무원 드로이드들이 각자 자리에서 대비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화면 구석구석에 비쳤는데, 그 와중에도 몇몇은 여전히 전투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임무를 다하려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들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경고: 무작위 워프 실행 시 생존 확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뻔했다. 나는 워프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실행해"
그 말이 끝나기 직전, 창밖으로 클론병사 함재기 하나가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게 보였고, 나는 그게 이 함선을 향한 최후의 일격이라는 걸 직감했다. 화면 안에서 그 함재기의 형체가 점점 커지는 게 보였고, 조타 드로이드도 그걸 봤는지 뭐라 소리치려는 것 같았지만, 그 목소리가 완성되기도 전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그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나는 이게 워프의 시작인지 함선의 파괴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