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눈을 다시 떴을 때 처음 느낀 건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었는데, 함내 전체를 채우는 낮고 불길한 경보음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어 피부 아래—정확히는 합성 신경망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왔는데, 함체 골격을 타고 올라오는 그 떨림이 마치 거대한 짐승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를 대신하는 후각 센서에는 그을린 금속 냄새 비슷한 신호가 잡혔고,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맞추는 동안에도 그 냄새—정확히는 냄새라고 부를 만한 데이터 패턴은 사라지지 않았다. 워프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적어도 완전히 산산조각 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 그 자체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워프 종료. 현좌표 미확인 항성계. 대한연합함대 관할 구역 외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관할 구역 외'라는 표현이 눈에 걸렸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 지도에도 없는 곳에 떨어졌다는 소리였고, 그렇다면 구조를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한 희망이었다. 나는 상황판에 뜬 별자리 배치를 훑어봤지만, 익숙한 항로 표지 하나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지도 밖으로 떨어졌다는 말을 넘어서, 애초에 그 지도를 그린 사람들조차 존재를 모르는 곳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함장님, 정신 드십니까"라는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함장석에서 몸을 일으키며 상황판을 살폈다.
"어, 그럭저럭. 피해 상황부터 보고해"
"엔진부 손상이 심각합니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투에서 이미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함장석에서 내려와 엔진실로 향했다. 발밑에서 갑판이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실제 기울기인지 아니면 내 균형 감각 센서가 오작동한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함선 전체가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하급 드로이드들—정비드로이드 '수리-05'와 포술드로이드 '조준-11'이 벽에 붙어 서로 뭐라 소곤대다가 나를 보고는 화들짝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그 어색한 침묵이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더 부각시켰다. 수리-05의 팔에 달린 렌치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서, '아, 저것도 무서워서 떨리는 건가, 아니면 그냥 부품이 낡아서 떨리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엔진실에 도착하자, 나는 곧바로 문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워프 코어를 감싼 외벽 일부가 뒤틀려 있었고, 그 틈새로 희미한 청백색 빛이 규칙적으로 깜빡이며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의 점멸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게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경고: 워프 코어 균열 발생. 엔진 출력 12% 이하로 제한됩니다. 수리 부품 재고 부족.]
'12퍼센트라니, 이건 걸어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도현이 옆에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연합함대와의 통신도 완전히 끊겼습니다. 발신 시도는 계속하고 있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 지금 완전히 고립됐다는 소리네"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 무미건조한 확답이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슬퍼하거나 당황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계산이 먼저 섰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는데, 아마 이 몸의 사고 회로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함내 방송을 켜고 승무원들에게 상황을 짧게 전달했는데, 통신망 너머로 여러 개의 드로이드 목소리가 술렁이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부품도 없다면서요", "함장님 믿어도 되는 겁니까" 같은 말들이 겹쳐 들려왔고, 그 목소리들 사이로 누군가는 아예 울음소리 비슷한 잡음을 내기도 했는데, 드로이드가 우는 소리를 낸다는 게 새삼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다들 진심으로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불안을 잠재우려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 방법이 있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순간 나조차도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함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이상 저 말은 해야 할 것 같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알림: 함장 한별-392의 개체 등급 재평가 요청이 시스템에 감지되었습니다.]
'뭐야, 이건 처음 보는 메시지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눈앞에 뜬 새로운 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지금까지 뜬 메시지들은 대부분 함선 상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건 명백히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문구였고, 그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고위전술드로이드 한별-392는 개조 과정에서 정식 등급 인증 절차가 생략된 미인증 개체입니다. 현 함선의 위기 상황을 계기로 잠재능력 재평가 프로토콜이 활성화됩니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이 원래는 함대 예산을 슬쩍 빼돌려 만들어진 고급 신체였다는 걸—함대 조달과장이 '미소녀 외형 고급 신체'라는 명목으로 예산을 빼먹은 결과물이 바로 이 한별-392였다는 걸, 나는 눈을 뜬 직후 정비 로그를 읽으면서 알게 됐었다. 그때 그 로그를 읽으면서 든 첫 생각이 '아니 이걸 이렇게 대놓고 문서로 남겨놨어?'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허술함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었다.
요컨대 나는 정식으로 등급 인증을 받은 적이 없는,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불량 재고'에 가까운 개체였다는 소리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함대 전산망에서 내 실제 스펙이 제대로 잡힌 적도 없었다는 뜻이었다. 등급도 없고, 서류도 없고, 그렇다면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함대 입장에서는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건데—그 생각을 하니 묘하게 서글퍼지려다가도, 곧바로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아무도 나를 제대로 재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재평가 프로토콜은 전투 데이터, 판단력, 생체 반응 등을 종합해 실시간으로 개체의 진짜 등급을 산출합니다. 산출 완료 시까지 시스템은 계속 관찰합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요컨대 지금까지 내가 서류상으로는 아무 등급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였는데, 이 위기를 겪으면서 시스템이 알아서 내 진짜 실력을 매기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 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이게 나쁜 소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등급이 없다는 건 상한선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른 정규 등급 개체들은 처음부터 '너는 여기까지'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시작하는 반면, 나는 그 딱지 자체가 없었으니 이 상황을 잘 넘기기만 한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아무도—심지어 나 자신조차도—모른다는 뜻이었다.
"함장님, 무슨 문제입니까"라고 도현이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방금 뜬 메시지 내용을 짧게 설명했다. 도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오히려 함장님께는 기회일 수 있겠군요"
"...너 지금 되게 무섭게 말하는 거 알아?"
그 말에 도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화제를 돌렸는데, 그 태연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위기 상황을 기회로 환산해서 말하는 저 사고방식이 드로이드다운 건지, 아니면 도현 개인의 성격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엔진 수리에 필요한 부품은 이 함선 내부에서는 조달이 불가능합니다. 외부에서 구해야 합니다"
"외부라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함내 재고를 다시 뒤져본다고 해서 없는 부품이 갑자기 생겨날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결국 이 미확인 항성계 어딘가에서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함내 경보음의 톤이 바뀌었다. 낮고 규칙적인 소리에서 짧고 날카로운 소리로, 마치 누군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듯 간격이 좁아진 경보음이 엔진실 전체를 채웠다.
[경고: 행성 표면에서 정체불명의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신호 패턴은 알려진 데이터베이스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도현과 눈을 마주쳤고,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서로의 표정—정확히는 표정이라고 할 만한 시각 센서의 미세한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미지의 행성계에 우리 말고도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신호가 자연 현상인지, 아니면 누군가—혹은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내보내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더 불안했다.
"...일단 저건 나중에 생각하고, 부품 구할 방법부터 찾자"라고 말했지만, 그 신호가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깜빡이는 걸 보면서, 나는 이게 결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신호는 마치 나를 향해 손짓하듯, 규칙적으로,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