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경이 준비하겠다고 말한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천계 지하의 봉인된 의식장에 서 있었다.
의식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길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돌계단이 차갑게 식어 있어서, 신발 밑창을 통해서도 그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다경이 앞장서서 등불을 들었고, 나는 뒤따라 내려가며 벽에 새겨진 낡은 문양들을 훑어봤다. 사용한 지 오래된 곳이라는 게, 벽에 쌓인 먼지의 두께만 봐도 짐작이 갔다.
"여기 진짜 몇 백 년은 안 쓴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정확히는 삼백이십칠 년입니다." 다경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숫자까지 알고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의식장은 원래 잘 쓰지 않는 곳이었다. 벽이 온통 검은 돌로 되어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오래된 소환진이 은실로 새겨져 있었다. 다경은 그 은실 위에 마지막 문양을 그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뭔가 계산을 다시 하는 것 같았다. 손끝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올 때마다 은실이 반응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이 소환진은 원래 뭘 위한 거야." 내가 물었다.
"전사자 소환입니다." 다경이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전장에서 죽은 순간의 무인을, 그 순간 그대로 이쪽으로 데려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소환하는 것보다 마나 소모가 훨씬 적습니다. 이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존재라서요."
"장점만 있는 것 같은데 왜 다들 안 쓰는 거야."
다경이 잠깐 멈췄다. 붓처럼 쓰던 마나 실을 허공에 띄운 채로.
"데려오는 순간, 죽던 그 순간의 몸 상태 그대로 옵니다. 즉, 부상도 그대로고, 죽음 직전의 감정도 그대로입니다." 다경이 나를 힐끔 봤다.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격 좀 나쁜 정도면 참을 수 있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참을 수 있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다경이 짧게 대꾸하고 다시 문양에 집중했다.
괜찮다. 성격 좀 나쁜 정도는 괜찮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뭘 몰랐을 때였다.
"누구를 데려올지는 어떻게 정해?"
"저희 쪽이 아니라 소환진이 정합니다. 재앙에 맞설 잠재력이 가장 큰 존재를 자동으로 끌어옵니다." 다경이 마지막 문양을 완성했다. 은실이 완성되는 순간 바닥 전체가 옅게 진동했다. "준비됐습니다."
"결과는 못 골라도,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데."
"실패하면 아무도 안 옵니다." 다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건, 반쪼가리로 오는 경우입니다."
"반쪼가리로 온다는 게 뭐야."
"몸의 일부만 오는 겁니다." 다경이 나를 쳐다봤다. "그런 사례가 문헌에 있습니다."
나는 순간 후회했다.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질문이었다.
나는 소환진 중앙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서 남은 신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빨려 나가는 감각이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아까워할 계제가 아니었다.
"시작해."
다경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낮고 일정한 음률이었다. 은실이 빛나기 시작했고, 그 빛이 점점 번지면서 곧 소환진 전체가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눈이 부셔서 나는 팔로 얼굴을 반쯤 가려야 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물이 쏟아졌다.
콰아아.
말 그대로 강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환진 바닥이 순식간에 물로 뒤덮였고, 물살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신발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느낌이 났다. 그 물 한가운데 사람이 하나 떠올랐다.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다 덮을 만큼 젖어 있었고, 왼쪽 어깨엔 화살 하나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갑옷 사이사이 틈으로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죽었어?" 내가 물었다.
"소환된 순간이 죽음 직전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다경이 서둘러 손을 뻗어 남자의 등을 받쳤다. 회복 마법이 손끝에서 흘러나갔다. 손바닥에서 옅은 초록빛이 퍼지며 남자의 상처 주위를 감쌌다. "지금이 그 경계 순간입니다. 살릴 수 있는지는—"
그 순간 남자가 숨을 몰아쉬었다.
켁, 컥.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온몸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짙은 눈썹 아래로, 흐릿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남자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이 후들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화살이 박힌 어깨를 짚었다가, 그대로 뽑아냈다.
뚝.
살점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조금 놀랐다. 웬만한 사람이면 소리 한 번은 지르는 게 정상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고, 아직 물이 덜 빠진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 거칠었다.
"천계다." 내가 대답했다. 여신으로서의 격을 갖춰 대답한 거였다. 나름 신경 써서.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위아래로 한 번, 천천히. 그 눈빛이 마치 값을 매기는 상인처럼 냉정했다.
"천계?" 남자가 되물었다. "내가 강에 빠져 죽었는데, 여기가 천계라고?"
"죽지 않았다. 죽음 직전에서 이쪽으로 데려온 거다."
남자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손에 쥔 화살촉을 바닥에 던지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물이 뚝뚝 흘러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럼 내 병사들은."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이끌던 병사들은 어떻게 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몰랐다. 이 남자가 어느 전장에서 왔는지, 언제 사람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소환진이 자동으로 골라 데려온 거라고, 다경이 말한 그대로였다.
내 침묵이 답이 됐는지,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모른다는 얘기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내 이름은 최도진. 고려의 무장이다. 강에서 화살을 맞고 빠졌던 걸로 마지막이 기억나는데." 그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당신이 나를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뭐냐."
"천계가 위기에 처했다. 재앙이라는 존재가 하계의 마나를 갈취하고 있고, 이대로면 천계 전체가 무너진다. 그걸 막을 힘이 필요해서 데려왔다."
최도진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웃음소리가 짧고 건조했다.
"그러니까 너희 신들 문제 해결하는 데 죽어가던 사람을 끌어다 쓴다는 거냐."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내가 왜 도와야 하냐."
말이 짧게 끊겼다. 도발이었다. 정확히 도발이었다.
"나는 여신이다." 나는 목소리에 위엄을 실었다. "내가 명령하면—"
"여신이든 뭐든." 최도진이 말을 잘랐다. "난 고려에서 상장군까지 지낸 사람이다. 살아서는 임금 앞에서도 함부로 무릎 꿇지 않았어. 죽고 나서 처음 보는 여자한테 명령받을 이유는 없다."
의식장 안의 다경이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태어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을, 살아서든 죽어서든 만난 적이 없었다. 신전에서 몇백 년을 지내는 동안 누구도 나한테 이런 말투로 말한 적이 없었다.
"명령이 아니라 계약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속으로는 손이 떨리는 걸 감추느라 애를 썼다. "재앙을 막으면 다시 살려서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주겠다."
최도진이 그 말에 잠깐 멈췄다.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젖은 눈썹 사이로 계산하는 듯한 눈치가 스쳤다.
"살려준다고."
"그래."
"내 병사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려줄 수 있나."
"찾아볼 수는 있다."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대답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옆에서 다경이 입을 살짝 열었다가, 내 표정을 보고 다시 다물었다.
최도진이 나를 다시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물이 흥건한 바닥에서 검을 하나 찾아 쥐었다. 소환될 때 같이 끌려온, 날이 무디고 이가 빠진 장검이었다. 손잡이를 쥐는 손짓이 자연스러웠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좋다." 최도진이 말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해두자. 나는 네 종자가 아니다. 내가 손을 빌려주는 건 계약이고, 계약이 끝나면 나는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간다."
"좋다." 나도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이 조건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여신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조건을 다는 인간, 아니 죽은 인간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조건은 그거뿐이냐." 최도진이 물었다.
"머무는 동안 지낼 곳과 필요한 건 제공한다." 내가 대답했다. "다만 재앙에 대해 알아야 할 게 많다. 그 부분은 협조해야 한다."
"협조는 하지. 복종은 하지 않는다." 최도진이 딱 잘라 말했다.
말장난 같으면서도 묘하게 명확한 구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부터," 나는 최도진을 향해 말했다. "동거를 시작하지."
최도진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흔들렸다.
"동거."
"천계에 머무는 동안 지낼 곳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서둘러 정정했다. "다른 뜻으로 듣지 마라."
최도진이 젖은 갑옷을 다시 한번 털며, 어깨의 상처를 무심히 내려다봤다. 방금 뽑아낸 화살 자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경이 다급하게 다시 회복 마법을 걸려고 손을 뻗었지만, 최도진은 그 손짓을 슬쩍 피했다.
"다른 뜻으로 들을 생각도 없었다." 최도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무릎이 꺾였다.
"어이."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생각보다 몸이 무거웠다. 갑옷의 냉기가 팔에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다." 최도진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단단했지만, 몸은 확실히 아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손끝으로도 느껴졌다. "이 정도 상처로 죽지 않는다."
"방금 강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최도진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 같았다.
다경이 급하게 다가와 회복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초록빛이 다시 어깨 상처를 감쌌고, 상처는 조금씩 봉합됐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입술 색도 정상이 아니었다. 강에서 화살을 맞고 빠져 죽어가던 몸이, 회복 마법 한 번으로 완전히 멀쩡해질 리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다경이 나를 보며 말했다. "무리하면 다시 경계로 넘어갑니다."
"경계로 넘어간다는 게 정확히 뭐야."
"다시 죽는다는 뜻입니다." 다경이 딱딱하게 말했다.
나는 최도진의 팔을 붙잡은 채로 잠시 그를 내려다봤다. 물에 젖은 갑옷, 뜯긴 어깨, 여전히 날이 선 눈빛. 이 사람이 앞으로 재앙과 맞서야 할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죽음 직전에서 끌려온 무인. 성격은 최악이고, 몸은 만신창이. 이게 천계가 마련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이 계약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