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패배한 명장, 여신의 검

4화

최도진이 정신을 잃은 뒤, 다경은 사흘 밤낮으로 그의 상태를 조사했다. 첫날은 회복실 근처를 서성이며 최도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을 측정했다. 계기판 숫자가 자꾸 튀었다. 둘째 날은 관리원 서고에 틀어박혀 오래된 기록들을 뒤졌다. 셋째 날 새벽에는 다경의 눈 밑에 그늘이 짙게 앉았다. 나는 그 사흘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신력이 3할 이하로 떨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회복실 문 앞을 지키는 것, 최도진의 숨소리가 일정한지 확인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상처는 표면적으로는 다 아물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종이처럼 하얬다. "찾았습니다." 다경이 두꺼운 문서를 들고 나타났을 때, 최도진은 여전히 회복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문서 표지에는 곰팡이 자국이 얼룩덜룩했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뭘 찾았는데." "저 사람이 힘을 쓰는 조건입니다." 다경이 문서를 펼쳤다. 낡은 필체로 쓰인 오래된 기록이었다. 글자 사이사이가 벌레 먹어 뜯긴 자리도 있었다. "전사자 소환으로 온 존재들은 보통 하계의 마나를 빌려 힘을 냅니다. 관문을 지나올 때 자동으로 부여되는 마나 회로가 있고, 그걸 통해 하계 기운을 받아들이는 게 정상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최도진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 빌려서 힘을 낸 거야." "자기 자신입니다." 다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회복실 안이라 그런지 소리가 유독 조심스러웠다. "명예가 걸린 상황,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 처하면, 몸에 남은 생명력을 태워서 힘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립니다. 무인들 중 일부에게서 발견되는 특성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그게 사기(士氣)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 병법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더군요. '사기가 오르면 병사 하나가 열을 감당한다'는 식으로." "낭만적으로 써놨네." "낭만이 아니라 자원 고갈입니다." 다경이 문서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생명력을 태운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남은 존재 유지 시간을 끌어다 쓰는 겁니다. 이미 죽음 직전에서 끌려온 몸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저 사람이 강한 힘을 쓸수록,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겁니다." "생명력을 태운다고." "정확한 계산은 어렵습니다만, 지난번 전투에서 보인 출력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한 번 크게 쓸 때마다 존재 유지 기한이 짧게는 사흘, 길게는 열흘씩 깎여나가는 걸로 보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이 세다는 게 이렇게 나쁜 소식이 될 줄은 몰랐다. 강한 무인을 소환했다고 좋아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 힘의 대가가 이런 식으로 청구서를 들이밀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방법이 없어?" "찾는 중입니다. 아직 없습니다." 다경이 문서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다만 확실한 건, 저 사람이 저 힘을 안 쓰면 셋째 관문의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딜레마입니다." "딜레마 좋아하네." 그날 밤, 최도진이 눈을 떴다. 끼익. 회복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흔들렸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냐." 최도진이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기력은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눈동자에도 초점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나는 다경이 알아낸 것을 그대로 전했다. 숨기지 않았다. 숨겨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문서에 적힌 사기(士氣)라는 단어까지, 존재 유지 기한이 깎이는 계산까지, 전부 그대로 말했다. 최도진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만 오히려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자꾸 흔들렸다. "알고 있었다." 최도진이 말했다. "알고 있었다고?" "살아서도 그랬다." 최도진이 몸을 조금씩 움직여 등을 벽에 붙였다. 힘겨운 동작이었지만 표정은 태연했다. "전장에서 밀릴 때마다 몸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그때마다 힘이 더 세졌고, 그다음엔 늘 이렇게 쓰러졌다. 부하들은 내가 신들린 것처럼 싸운다고 했다. 정작 나는 그날 밤마다 피를 토하고 잠들었다." "의원들은 뭐라고 했는데." "의원들도 뭔지 몰랐다." 최도진이 천장을 바라봤다. 눈빛이 잠깐 먼 곳을 향했다. "몸이 상한다는 것만 알았다. 원인은 몰랐다. 나도 몰랐다. 이제 알았을 뿐이다." "그럼 다시는 그 힘을 쓰지 마." 최도진이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조금 서늘했다. 방금까지 담담하게 옛이야기를 하던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안 된다." "왜." "내가 그 힘을 안 쓰면 관문이 뚫린다. 그러면 여기 있는 신관들도, 하계 사람들도 다친다." 최도진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힘겨워 보였지만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는 손짓조차 절도가 있었다. "나는 살아서 병사들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서까지 지킬 수 있는 걸 안 지키면, 그건 두 번 지는 거다." 명예. 이 남자가 그렇게 중시한다던 그 명예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해가 안 되는 척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살면서 그런 걸 목숨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명예라는 거, 죽어서까지 챙길 필요는 없잖아." "살아서 못 챙긴 거니까 죽어서라도 챙기는 거다." 최도진이 짧게 대꾸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투였다. "그럼 조건을 좀 걸자." 내가 말했다. "힘을 쓰는 건 막지 않겠다. 대신 반드시 다경이 옆에서 회복 마법을 준비하고,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내가 강제로라도 멈추게 할 거다." "강제로 멈춘다고." 최도진이 피식 웃었다. 웃는 얼굴에 비웃음보다는 헛웃음이 섞여 있었다. "네 신력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네 힘은 겨우 3할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못 해도, 나중엔 할 거다." "근거 있는 소리냐." "근거는 없고 오기만 있다." 최도진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니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좋다. 그 조건으로 하지." 동의는 얻었지만,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명예 때문에 자기 목숨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상대가 언제든 그 계약을 깨고 자기 목숨을 걸어버릴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도장을 찍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나는 회복실을 나오다가 다경과 마주쳤다. 복도 조명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다. 다경은 여전히 그 낡은 문서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경이 물었다. "뭐가." "저 사람과 이렇게 계속 함께 가는 것 말입니다." 다경이 문서를 고쳐 안았다. "저 사람은 힘을 쓸 때마다 목숨을 깎고 있습니다. 재앙을 막기 전에 저 사람이 먼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여신님께서 그걸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경의 말이 맞았고, 나도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입 밖으로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다경." "네." "방법 계속 찾아봐. 존재 유지 기한 깎이는 걸 막을 방법이든, 대체할 방법이든, 뭐든." "찾고 있습니다." 다경이 짧게 답하고 돌아섰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신탁관이 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부터 급했다. 똑똑똑, 규칙 없이 세 번. "여신님. 셋째 관문 상황을 보고받으신 재판회에서, 정식 진압 작전을 승인해달라는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신탁관의 손에는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고, 겉장에는 붉은 도장이 벌써 찍혀 있었다. 승인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작전이라니. 벌써?" "재앙의 세력이 예상보다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신탁관이 서류를 펼쳐 표를 하나 짚었다. 숫자가 나흘 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지금 진압하지 않으면 넷째 관문까지 위험합니다. 이미 관리원 내부에서는 새로 소환된 무인의 실력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돌고 있고, 다들 이 기회에 정식 작전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습니다. 재판회 쪽에서는 이번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실력을 확인했다는 보고라니. 누가 그런 보고를 올렸는데." "관문 경비대에서 목격 사례를 정리해 올렸습니다. 최도진이라는 소환자가 단신으로 재앙의 선봉을 밀어냈다는 내용입니다." 신탁관이 말을 이었다. "그 보고 이후로 재판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 승인해주시면 사흘 내로 작전을 착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최도진의 상태를 정확히 알리면 작전 승인이 늦어질 게 분명했다. 아니,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최도진 자체가 작전에서 배제될 수도 있었다. 재판회는 위험 요소를 절대 남겨두지 않는 조직이었다. 존재 유지 기한이 깎이고 있는 소환자를 정식 전력으로 인정할 리 없었다. 내 신력이 3할 이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 모두 숨기고 진행하면, 최소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시간을 번다는 게 정확히 뭘 위한 시간인지는 나도 몰랐다. 방법을 찾을 시간인지, 아니면 그냥 결정을 미루는 시간인지. "승인한다." 나는 대답했다. "작전 준비해." "신력 상태는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신탁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눈치가 빠른 자였다. "필요 없어. 진행해." 신탁관이 잠깐 나를 살피다가, 더 묻지 않고 서류를 챙겨 물러났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신탁관이 물러난 뒤, 나는 창밖으로 넓어지는 검은 안개를 바라봤다. 관문 너머로 퍼진 그 안개는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사흘 전보다 확실히 경계선이 가까워져 있었다. 최도진의 몸도, 내 신력도, 둘 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상태로 재앙과 맞서야 했다. 온전한 쪽이 하나도 없는 싸움을 온전한 것처럼 꾸며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결정이 우리 둘 중 하나를 먼저 잃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창밖 안개가 유리에 닿을 듯 가까워 보였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작전은 사흘 뒤였다. 사흘이면 최도진의 몸이 얼마나 회복될지, 내 신력이 얼마나 돌아올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사흘 뒤, 우리는 어떤 상태로든 그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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