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의 촛불이 수백 개쯤 되어 보이는 유리 장식에 부딧혀 흔들릴 때마다, 백현우는 자신이 앉은 상석의 방석이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몸이 이렇게 편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데, 그게 방석 때문인지 아니면 이 공간 전체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연회라고 했다. 궁정의 시녀들이 저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그를 향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축사를 늘어놓는 동안, 현우는 그 모든 얼굴들 사이에서 자신이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왜 여기 있는 게 다 여자뿐이지.
식탁을 채운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이, 은근한 눈웃음으로 술잔을 건네는 이, 저 끝에서 조용히 접시만 내려다보는 이까지. 누구 하나 남자로 보이는 얼굴이 없었다. 궁정 시종부터 호위병까지, 이 넓은 연회장을 통틀어 검을 찬 이들도 전부 스커트 자락을 늘어뜨린 여자들이었다.
그 의문이 명치 어디쯤인가에서 뭉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정작 그 답을 찾기도 전에 연회장 한복판에서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비명이 뒤따랐고, 곧이어 누군가의 드레스 자락에 검붉은 얼룩이 번지는 것을 본 현우는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를 스스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탁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고 접시들이 바닥에 쏟아지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 손길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판단할 겨를조차 없었다.
호위 시녀들이 검을 뽑아 들고 연회장 창문 쪽으로 몰려가는 사이,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가 왜 이래.'
평소라면 이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문득 자신의 다리가 평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창밖에서 스며든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촛불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보았고, 그 기운이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감각을 느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 짧은 틈, 뒤통수부터 정수리까지 얼음물이 흐르는 것 같은 서늘함이 지나갔다.
낯선 기억들이었다. 아니,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익숙했다.
대학 강의실, 늦은 밤 기숙사 방, 모니터 불빛 아래에서 밤을 지새우며 클릭하던 마우스,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불러왔던 세이브 파일들.
《오탁궁정에서 사는 너》.
제목이 떠오르는 순간 현우는 숨이 턱 막혔다. 성인 게임, 그것도 수십 번을 플레이하며 히로인들의 엔딩을 하나하나 확인했던 그 게임이었다.
패키지 표지의 그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은빛 갑주를 두른 성녀, 로브 자락 아래로 마법서를 껴안은 소녀 마법사, 그리고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던 주인공. 다시 떠올리자니 손끝이 저릿한 게 우습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연회장, 이 촛불, 저 검을 뽑아 드는 시녀들의 옷차림까지 — 전부 그 게임 속 청라국의 궁정과 완전히 같았다. 벽지의 문양 하나, 창가에 걸린 커튼의 색깔 하나까지도 어긋나는 데가 없었다.
'그럼 나는.'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게임 오프닝 일러스트에서 봤던 남주인공, 백현우의 손이었다. 가늘고 흰, 아직 검을 잡아본 적 없는 손.
손톱 모양까지 똑같았다. 원래 자신의 손과는 확실히 다른, 더 여리고 더 흰 손이었다. 이 손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되레 헛웃음이 나왔다.
알 바인가, 하고 넘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세계의 결말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이 게임의 남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파멸한다. 히로인들은 하나씩 악한 세력에게 붙잡혀 노예로 전락하거나 겁탈당하며, 마지막엔 마족의 군대가 왕도를 짓밟는다. 유일하게 그 참극을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 '임신 엔드' — 주인공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때 우연히 발생하는 그 루트뿐이었다.
수십 번 플레이하면서 그 엔딩만은 굳이 보려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히로인 하나 골라 잡고 진행하면 자연스레 다른 결말로 흘러갔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게임의 설정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원작에서 히로인들을 겁탈하고 파멸시키는 악당들 — 그 남성 캐릭터들이 전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연회장 저편에서 검은 안개가 걷히고, 시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도 현우는 그 사실이 자꾸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남녀 성비가 1대 30으로 무너졌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 있어야 할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으로 변해버렸다고, 어렴풋한 기억 속 설정집의 한 줄이 떠올랐다. 게임 발매 전 공개됐던 세계관 자료집, 본편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뒷설정. 그런 걸 굳이 찾아 읽었던 자신이 지금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 말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남자가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임신 엔드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현우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원작 그대로 흘러간다면, 자신이 알던 그 수많은 히로인들이 결국 전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이었다.
순백의 성녀, 천재 소녀 마법사, 그리고 —
세 번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분명 히로인이 셋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지막 한 명의 얼굴만은 흐릿하게 지워진 것처럼 잡히지 않았다.
연회장 문이 열리고 시녀장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무언가를 보고하는 사이, 현우는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녀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다급했다. 왕도 외곽에 검은 안개가 다시 관측되었다는 말, 국경 수비대가 이상 징후를 보고했다는 말들이 토막토막 들려왔다. 원작 초반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걸 현우는 뒤늦게 알아챘다. 이 정도로 초반이라면, 아직 손을 쓸 여지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저들을 구하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명치 아래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게임 속에서는 선택지를 고르면 끝날 일이었다. 이 대화에서 무슨 대답을 하고, 어느 이벤트에 참여하고. 그런데 지금은 화면도 없고 선택지 창도 뜨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겁에 질려 있었고, 그 공포가 진짜였다.
그 답을 찾기도 전에, 연회장 안쪽 문이 다시 열리며 은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이라고는 조금도 읊을 수 없는 얼굴, 얼음처럼 맑은 눈동자. 걸음마다 은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조차 지나치게 정갈해서 마치 유리로 깎아 만든 인형이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현우는 자신이 그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숨이 막혔다.
세 번째 히로인이었다. 방금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그 이름이,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냉소적이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원작에서 가장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던 바로 그 캐릭터.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