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은채의 손목에 남은 흉터를 붕대로 감아주는 동안, 현우는 자신의 손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조심스레 힘을 빼려 애썼는데, 그 서투른 손길에 오히려 은채가 더 당황한 얼굴로 몸을 굳혔다.
붕대는 얇고 하얬으며, 손끝에 닿는 그녀의 살갗은 놀랄 만큼 차가웠다. 겨울 창가에 오래 놓아둔 도자기 인형 같다고, 현우는 생각했다. 조금만 세게 쥐면 금이 갈 것 같은.
"소인이 직접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붕대를 마무리했다. 은채의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접촉 때문인지 현우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놀랄 거면 진작 말하지.'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 대신 현우는 붕대 끝을 야무지게 접어 넣고, 손을 거두었다. 그 짧은 접촉이 끝나갈 무렵, 현우는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켜내려 애썼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감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적어도 은채만큼은, 원작 그대로의 비극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명치 아래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물론 그 다짐이 다른 히로인들에게까지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했지만.
그날 이후 은채는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 예법 수업 중에도 종종 현우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잠에서 막 깬 작은 짐승처럼 서투르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식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은채는 수저를 들다가도 현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끼면 손끝을 살짝 떨었고, 그러다 결국 국물을 옷섶에 조금 흘리기까지 했다. 시녀들이 황급히 다가와 닦아주는 동안 은채의 목덜미가 발갛게 물드는 것을, 현우는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까지 긴장할 일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게임 속 설정대로라면 은채는 어릴 적부터 궁에 갇혀 살며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서투른 손길 하나에도 세상이 흔들릴 만큼.
현우는 그런 은채의 태도를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 이 세계가 게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그리고 다가올 위험이 무엇인지 — 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게임 속 시나리오를 떠올려보았지만, 기억은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어느 장면이 진짜 있었던 일이고 어느 장면이 자신의 상상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보를 가장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의 정점에 있는 여왕 김유란뿐이었다.
게임 원작에서는 국왕이 남성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우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남녀 성비가 무너지며 벌어진 변화가 왕좌에까지 미쳤다는 뜻이었다.
알현을 청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궁정의 관례상 어린 정혼 귀족이 여왕을 독대로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고, 시녀장들은 몇 번이나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백 공작가의 후계자께서 여왕 폐하를 뵙는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시녀장은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찌푸렸는데, 그 말투에는 어린 귀족이 감히 무엇을 알겠느냐는 은근한 비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현우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청을 넣었다.
하지만 현우가 은채를 통해 재차 청을 넣은 끝에, 결국 사흘 뒤 오후 여왕의 개인 응접실로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은채는 그 소식을 전하며 어쩐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는데, 여왕에 대한 소문이 궁 안에 좋게만 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왕 폐하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분이시니."
은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설명하지 않았고, 현우는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
사흘은 길었다. 현우는 그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자신이 여왕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되짚었고, 어떤 말은 너무 위험하게 들릴 것 같아 지웠다가 다시 썼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화려한 붉은 커튼과 금박 장식으로 둘러싸인 방 안, 낮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여왕 김유란의 모습은 게임 원작 일러스트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던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노출이 많은 짙은 자주색 의상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매끄러웠고, 과장되게 풍성한 몸매의 실루엣이 소파 위에서 나른하게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세트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배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방 안에는 향이 타는 냄새와 짙은 화장품 향이 섞여 은은하게 감돌았고, 그 냄새마저 현실감을 지워내는 데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백현우 공이 짐을 보고 싶다 하였다지."
여왕이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웃음에는 짙은 여유가 배어 있었다.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모습이,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우는 목이 마른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무릎이 소파 앞 바닥에 닿을 듯 가까워서, 여왕의 숨결까지 느껴질 것 같은 거리였다.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세계가, 제가 알던 것과 얼마나 같은지."
그 말에 여왕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현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오래된 그림을 감정하듯, 현우의 얼굴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듯했다.
"흥미로운 질문이구나. 짐 역시 짐이 알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늘 궁금했느니라."
그 대답에 현우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눈앞의 이 여왕 역시 자신처럼 원래의 세계를 기억하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짐작을 했다. 그것이 확신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설마, 이 사람도.'
그런데 왜 그렇게 여유로운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현우는 오히려 그 여유가 두려워졌다.
여왕은 그런 현우의 표정을 살피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소파 위에 놓인 얇은 부채를 집어 들어 천천히 펼쳤는데, 그 동작 하나조차도 계산된 것처럼 느긋하고 우아했다.
"이 나라는 그대가 아는 이야기와 비슷한 뼈대를 가지고 있으나, 곳곳에 균열이 있다. 그대가 아는 결말이 그대로 오리라 믿지 말라."
그 말은 위로가 되기도 했고 동시에 더 큰 불안을 안기기도 했다. 균열이 있다면, 그 균열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현우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지만, 곱씹을수록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가 알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면, 이 궁 안에만 머물러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니라."
여왕이 손짓을 하자 곁에 서 있던 시녀가 두꺼운 통행 인장을 가져와 현우 앞에 내려놓았다. 인장은 묵직한 은빛이었고, 표면에는 낯선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을 대보지 않아도 그 무게가 짐작될 만큼 단단해 보였다.
"짐이 그대에게 왕궁 밖 출입을 허하겠다. 다만 조건이 있다."
현우는 그 인장을 내려다보며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 그것은 게임 속 다른 히로인들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첫 발판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손끝이 저릿해질 만큼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여왕은 다시 나른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부채를 접었다 펴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가볍게 갈랐다.
"그건, 그대가 밖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직접 겪은 뒤 알게 될 것이니라."
그 알 수 없는 대답에 현우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인장을 향해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손끝이 인장의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 여왕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호기심인지, 혹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여유인지 현우로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인장을 손에 쥐고 응접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왕의 낮은 웃음소리가 현우의 발걸음을 자꾸만 무겁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