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빙설의 영애, 강서윤.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순간 현우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이미 식은땀이 배어 있었고, 그 땀이 옷감에 스며드는 감각조차 지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소녀는 은빛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곧게 늘어뜨린 채, 옷깃 끝까지 여며진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 마치 눈이 쌓인 들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목까지 감싸는 레이스 끝단이 그녀의 하얀 피부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흡사한 색이어서, 마치 그 자체로 몸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은 가문의 장녀. 게임 설정집에서는 그녀를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인 적 없는 얼음 인형'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지금 눈앞의 소녀는 그 문장보다 훨씬 더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형이라는 표현조차 지금 이 순간엔 너무 다정한 비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시종이 그녀를 현우의 맞은편 자리로 안내하는 동안, 강서윤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현우를 응시했다. 걸음걸이는 놀라울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마저 조심스레 죽여 놓은 듯,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연회장의 촛불조차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는 적의도,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관찰하는, 유리 너머에서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마치 스크린 뒤에서 배우의 연기를 채점하는 감독 같은 눈이었다고, 현우는 나중에야 그렇게 생각했다.
현우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목이 마른 것 같았지만 물잔을 들어 올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손끝이 잔의 표면에 닿기만 해도 그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눈에 고스란히 읽힐 것 같아서였다.
'왜 저렇게 무섭지.'
분명 나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어릴 텐데도, 강서윤이 자리에 앉는 그 짧은 동작만으로도 연회장 안의 공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으며 등을 곧게 세우는 그 자세 하나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겹쳐 놓인 채 미동조차 없었다.
게임 속에서 그녀는 원작 3화 즈음까지도 이렇다 할 대사가 없는 캐릭터였고, 대부분의 정보는 나중 루트에서야 밝혀졌다. 그런데 지금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설정집 몇 줄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화면 속 도트나 일러스트로만 봤던 얼굴이 이렇게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고, 촛불 아래서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이 현우에게는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백현우 공."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며, 억양 하나 없이 평평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미리 준비해 둔 문장을 그대로 읽는 것처럼, 어떤 감정의 굴곡도 섞이지 않은 채였다.
"오늘부로 정혼자가 되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그 짧은 문장이 자신이 알던 게임 속 설정 — 정략 혼약 — 을 그대로 확인해주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 사실을 실감하기도 전에 먼저 밀려온 건 순전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게임 속에서 강서윤은 결국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다시 뒤엉키며 떠오르는 장면들 속에서, 현우는 그녀가 후반부에 맞이하는 결말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노예 상인의 손에 팔려가는 장면, 사슬에 묶인 손목, 얼음처럼 굳어버린 그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 — 게임 화면 너머로만 보던 그 CG가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소녀의 실제 얼굴과 겹쳐지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CG 아래 붙어 있던 대사창의 문구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문은 저를 버렸습니다.' 그 짧은 한 줄이 지금 눈앞의,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는 소녀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는 순간, 현우는 자신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그리고 격렬하게 실감했다.
강서윤은 그런 현우의 반응을 다르게 읽은 듯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처음 만난 정혼자가 자신을 마주하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지고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서윤은 그것이 자신의 가문이 지닌 오래된 명성 — '피의 청은가'라는 별칭 —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어차피 익숙한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늘 그녀를 마주하면 저렇게 굳었다. 하녀들도, 시종들도, 심지어 몇 번 마주쳤던 다른 가문의 자제들도 그랬다. 그러니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편했다. 거리를 재기 쉬웠으니까.
다만 이상한 건, 저 소년이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두려움과 함께 어떤 종류의 슬픔 같은 것이 그 눈동자 속에 스치는 걸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눈빛이었다.
'왜?'
짧은 의문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떠올랐지만, 서윤은 그 의문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정략으로 묶인 사이일 뿐이다. 감정을 섞어 볼 이유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필요 이상의 것을 궁금해하지 말 것.
그럼에도 서윤은 손끝으로 무릎 위 천의 주름을 한 번 매만졌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요의 표현이었다.
"불편하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현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다 그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소매 끝단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춰 섰고, 그 짧은 정지의 순간 동안 연회장의 음악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임 지식이 있다는 게 이럴 때는 오히려 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위로를 하기엔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경고를 하기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서윤은 그 어정쩡한 손짓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 손짓을 붙잡히려는 시도로 이해했지만, 그 이유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붙잡힐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짧은 의문이 스쳤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균열도 없었지만, 현우는 그 순간 자신의 손끝이 그녀의 소매 끝을 스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진 것은 온기라기보다는 서늘함에 가까웠는데, 그게 오히려 그녀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연회장 안의 시선들이 두 사람 쪽으로 잠깐씩 향했다가 다시 흩어졌다. 누군가는 정혼 소식을 이미 들었는지 나지막이 귀엣말을 주고받았고, 누군가는 술잔을 든 채 두 사람의 어색한 거리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 모든 시선 속에서 현우는 자신이 무대 위에 홀로 세워진 배우처럼 느껴졌다. 대본도 없이, 카메라 앞에 던져진 채.
연회는 그렇게 어색한 정적 속에서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새로운 요리를 내오고, 악사들이 곡을 바꾸고,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다시 높아졌지만 현우와 서윤이 앉은 자리만은 여전히 그 정적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현우는 그 밤 내내 자신이 구해야 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슬에 묶인 손목, 눈물조차 얼어붙은 것 같던 그 CG 속 얼굴이, 오늘 자신의 손끝이 스쳤던 그 서늘한 소매의 감각과 겹쳐지며 자꾸만 되살아났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무언가를 놓쳐버린 것 같은 불안이 가슴 한복판에 무겁게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