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인장을 손에 넣은 다음 날, 현우는 처음으로 왕궁 밖 거리를 걸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호위로는 다름 아닌 서은채가 함께하게 되었다.
여왕의 시녀장이 직접 통행증을 내주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던 게 떠올랐다. 정오까지 돌아오시라고, 큰길에서 벗어나지 마시라고,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조곤조곤 일러주는 통에 현우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게임 속에서는 주인공이 마음대로 필드를 돌아다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까지 제약이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궁 밖의 거리는 게임 화면에서 몇 번이고 지나쳤던 배경이었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그 냄새와 소음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노점에서 풍기는 향신료 냄새, 마차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흙먼지, 그리고 지나가는 여인들이 던지는 힐끔거리는 시선까지 — 모든 것이 화면 속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감각으로 그를 에워쌌다.
특히 눈에 들어온 건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게임 속 NPC들은 정해진 대사만 반복하는 존재였는데, 지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저 상인은 진짜로 흥정을 벌이고 있었고, 저 아이는 진짜로 울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와서, 현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쪽 조심하셔야 합니다, 공자님."
은채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며칠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부드러워진 기색이 스며 있었다.
현우는 그런 은채를 곁눈질로 살피며, 그녀가 자신의 팔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걷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손목에 매인 검집이 걸을 때마다 옷자락에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현우의 신경을 계속 끌어당겼다.
'경계 때문에 붙어 있는 걸까,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현우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여왕이 넘겨준 인장의 의미도, 균열이라는 말의 실체도 아직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번화가를 지나 어느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던 참, 갑자기 마차 한 대가 모퉁이를 빠르게 돌아 나오며 두 사람 쪽으로 튀어들었다. 말발굽이 땅을 긁는 소리와 마부의 다급한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골목 안 좁은 공간을 그 커다란 몸체가 그대로 덮칠 듯 밀고 들어왔다.
"위험해요!"
은채가 반사적으로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 힘에 두 사람은 서로 뒤엉키듯 골목 벽 쪽으로 넘어질 뻔했다. 등이 벽돌담에 닿는 순간 딱딱한 냉기가 옷을 뚫고 스며들었고, 그 순간 현우의 손이 무언가를 붙잡으려다 은채의 손등을 스치듯 덮었다.
짧은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현우는 심장이 통째로 뛰어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은채의 체온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그 뜨거움이 손등을 타고 팔뚝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뼈마디가 가늘게 떨리는 것도 느껴졌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차는 요란한 소리를 남기고 이미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벽에 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은채 역시 그 접촉을 느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마차가 이미 저 멀리 지나갔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현우의 손 아래 눌린 자신의 손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뭐지.'
단순한 충성이라면 이런 감각이 들 리 없었다. 심장이 튀어나갈 것 같고, 목덜미가 붉어지는 이 느낌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아온 어떤 감정과도 달랐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등을 오므리려다가, 그마저도 현우의 손 아래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그대로 굳었다.
현우가 먼저 손을 떼며 어색하게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는 발끝이 자갈에 걸려 살짝 비틀거리는 통에, 그 어색함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죄송, 아니 다친 데 없어요?"
말이 어정쩡하게 뒤섞여 나왔다. 은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손등에는 여전히 그의 손이 남긴 온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등을 슬쩍 다른 손으로 덮어 감췄는데, 그 동작이 오히려 더 티가 났다.
두 사람은 그 뒤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란히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번화가로 접어드는 길, 저녁 햇살이 지붕들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으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노점상들이 하루 장사를 정리하며 좌판을 걷는 소리, 어디선가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 그 모든 것이 평소라면 눈에 담기지도 않았을 사소한 풍경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각인되는 듯했다.
현우는 그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느낀 감정이 단순한 놀람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림자 두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가, 걸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살짝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걸 보며, 그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지금은 은채와의 감정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여왕이 말한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히로인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인장을 손에 넣었다는 건 시작에 불과했고,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하지만 그 급박한 다짐과는 별개로, 손등에 남은 은채의 온기가 자꾸 마음 한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로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온도를 처음 느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길, 은채는 몇 번이나 현우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조심스럽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정작 입을 열 때마다 목소리가 목 안쪽에서 잠겨버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었고, 그 모습을 옆에서 눈치채지 못한 현우는 그저 앞만 보며 걸었다.
"공자님."
결국 그녀가 조심스레 불렀다.
"오늘, 함께 나와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즐거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녀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현우는 그 말끝을 기다리다가, 은채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자신도 알 수 없는 온기가 가슴 한쪽에서 퍼지는 걸 느꼈다. 말을 끝맺지 못한 그녀의 옆얼굴이, 이상하게도 게임 속 완벽하게 렌더링된 그림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도, 좋았어요."
짧게 대답한 그 한마디에, 은채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제 두려움도 경계도 아닌, 처음 보는 종류의 감정이 어렴풋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원래 속도를 찾는 데는 몇 걸음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왕궁으로 향하는 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기가 신원을 확인하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고, 그 짧은 틈 동안에도 은채는 자꾸 손등을 매만졌다.
그런데 그 순간, 문 안쪽 그늘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스치듯 나타났다.
강서윤이었다. 정혼자로서 마중을 나온 듯했는데, 그녀의 시선은 현우가 아니라 그의 곁에 나란히 붙어 서 있는 은채에게 먼저 향하고 있었다. 저녁 그늘 속에서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만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고, 그 아래 얼굴은 그늘에 반쯤 잠겨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표정 없던 그 얼굴 위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균열이 스치는 것을, 현우는 분명히 보았다. 그 균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방금 본 것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강서윤 님."
은채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예의를 갖췄지만, 그 말투 속에 어딘가 조심스러운 긴장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강서윤은 대답 대신 천천히 시선을 옮겨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현우는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반가움인지, 확인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