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순간, 대지가 흔들렸다.
쿠웅.
무언가 거대한 힘이 지면을 짓눌렀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혈마군 세 마리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딧힌 것처럼.
나는 그 광경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달려들던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굳어 있었다.
"단장님!"
누군가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은빛 갑주를 입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서경이었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흙먼지가 가볍게 튀어 올랐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 무기도 없었지만, 그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무거운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공기 자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이... 단장.)
나는 숨을 죽였다.
직접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존재감이, 실제로는 훨씬 더 짙었다.
그녀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푸른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갔다.
빛은 가느다란 실처럼 뻗어 나가더니, 곧 넓게 퍼지며 세 마리의 몸을 휘감았다.
혈마군 세 마리의 몸이 그 빛에 휘감기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붉은 눈동자만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몸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제압."
짧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순간 남은 전위병들이 전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누군가는 반쯤 들었던 무기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철컹, 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마저 이 정적 속에서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서경은 강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그를 향해 있었다.
다른 누구도, 다른 무엇도 보지 않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여전히 검을 든 채 서 있었지만, 눈빛이 조금씩 초점을 되찾고 있었다.
아까까지 텅 비어 있던 그 눈동자에, 서서히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도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정확히 그 중간 지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반복해왔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돌아와."
강도현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검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툭.
그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팔목을 감싼 나선 문양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검은빛이 살갗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갔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주 흐릿한 자국이 남아,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그의 팔목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끝났다... 아니, 끝난 게 아니야.)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이 실감 났다.
쓰러진 마차, 부서진 상자들, 그 사이에 흩어진 물건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피 냄새가 바람에 섞여 코끝을 스쳤다.
한서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압된 혈마군 세 마리, 널브러진 시체들, 뒤집힌 마차.
그녀의 눈이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만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본대 근처까지 척후가 나왔다는 건..."
그녀의 시선이 북쪽 황무지를 향했다.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바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방향 자체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예상보다 빠르네요."
윤미래가 다가와 낮게 보고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뭔가를 적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장님, 오늘 확인한 척후 규모로 보면 본대가 이미 여드레 거리 안까지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레."
한서경이 정정했다.
"보고서에는 이레로 올려."
윤미래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동안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은 강도현에게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숨이 아직 거칠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릴 때마다, 그의 갑주에서 낮은 마찰음이 났다.
"강도현 씨, 괜찮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옅은 나선 문양을 손끝으로 짙게 문질렀다.
마치 그 흔적을 지우려는 듯이.
손끝에 힘이 들어갈수록 살갗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치료사님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다른, 훨씬 지친 떨림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치료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마차 뒤에서 다른 형체 하나가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왼쪽 팔이 없었고, 두 눈에는 하얀 천이 감겨 있었다.
박태식이었다.
그는 보급대를 호위하러 나왔던 인원 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강도현이 서 있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쪽으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 방향을 향해 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강도현."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강도현이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둘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잠깐 사라진 것 같았다.
바람 소리도, 병사들의 낮은 신음도, 전부 멀어진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살았군."
박태식이 낮게 웃었다.
웃음에 안도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의 눈은 볼 수 없었지만, 표정 전체에서 그 어색한 균열이 느껴졌다.
"...박태식 님."
강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고맙다. 오늘도."
그 말에 강도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마치 감사받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처럼.
그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광경을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박태식의 없는 왼팔, 감긴 두 눈.
저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흐르는 공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전우 이상의 무언가가, 그것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얹혀 있었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어.)
박태식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절뚝이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강도현이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서경이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조용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 경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서야,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서윤 치료사님."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 본 것에 대해서, 나중에 이야기 나눕시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확실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한서경은 그 대답을 듣고서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윤미래와 함께 부상자들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여전히 무거운 정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쓰러진 마차, 굳어버린 혈마군, 무릎을 꿇은 강도현, 그리고 절뚝이며 사라져가는 박태식의 뒷모습까지.
이 모든 장면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나는 그 연결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박태식은 왜 강도현에게 고맙다고 한 걸까. 그 상처를 준 사람이... 강도현이라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나는 다시 강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팔목의 흐릿한 나선 문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방금 전까지의 지친 기색과는 또 다른, 훨씬 깊은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