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민서의 손끝이 뚜껑 표면에 닿았다.
차갑고 거친 나무의 감촉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물건 특유의, 눅눅하면서도 메마른 먼지 냄새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방 안은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은채의 울음소리가 가득 차 있던 곳이었다. 재훈이 팔을 잃고 치명상을 입은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이 상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다. 그 사실이 셋 모두를 한층 더 신중하게 만들었다.
"잠깐."
한도경이 낮게 그녀를 멈춰 세웠다.
"함정일 수 있어. 재훈이가 당한 게 바로 이 방이야. 확인 안 된 상자를 함부로 여는 건 위험해."
그의 말에는 경험이 실려 있었다. 던전을 오래 돌아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얼마나 많은 동료를 잃어봐야 이런 조심성이 몸에 붙는 것인지, 민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민서의 손이 뚜껑에서 살짝 떨어졌다.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 확인은 어떻게 하는데요?"
"감정 스킬로 살펴봐. 기척이 있는지, 마력 반응이 있는지."
한도경의 지시에 민서가 눈을 감고 짧게 집중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정신을 상자 표면 아래로 밀어 넣는 감각이었다.
그것은 그 순간을 온몸으로 느꼈다. 낯선 힘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끝이 살가죽 위를 천천히 더듬는 것 같았다.
'탐지인가.'
이 감각탐지라는 것이 자신을 어떻게 읽어낼지 알 수 없었다. 몸통 안에는 이미 부풀어 오른 공복감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고, 그 굶주림이 어떤 형태로든 감지될 위험이 있었다. 방금 핥아 맛본 핏물의 온기가 아직 다 식지 않은 채로 몸통 안쪽에 남아 있었다.
'들키면 끝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 형태를 최대한 상자에 가깝게, 무기물에 가깝게 붙잡아두려 애썼다. 이가 촘촘히 박힌 뚜껑 안쪽을 최대한 잠들게 만들었다. 혀를 몸통 가장 깊은 곳에 완전히 말아 넣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온몸의 힘을 쥐어짜냈다.
이런 순간마다 떠오르는 규칙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새겨진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사냥감이 다가올 때,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는 법이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규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민서의 눈꺼풀이 잠시 떨렸다.
"음... 이상하네요."
"뭐가."
"뭔가 있긴 한데, 너무 약해서 잡히다 말다 해요. 그냥 오래된 마력 잔재일 수도 있고."
민서의 설명에 한도경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하지 않다는 거군."
"네. 근데 던전 상자에 마력 잔재 정도는 흔하잖아요. 그냥 보물상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민서는 자신의 스킬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여태까지 이 스킬이 완전히 틀린 적은 없었다. 물론, 완전히 맞은 적도 몇 번 없다는 사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확실한 게 아니면, 좀 더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민서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한도경은 팔짱을 낀 채 상자를 노려보았다.
"지켜본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서 밤을 새울 수도 없고."
서은채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눈가는 여전히 붉었지만, 목소리는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방금까지 석실에 남아 있던 재훈의 팔뚝 옆에 웅크려 있던 그녀였다. 눈물이 점차 말라서 더는 흐르지 않았다.
"재훈이가 이 방까지 왔다는 건, 이게 진짜 보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해. 걔가 헛걸음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는 죽은 동료를 향한 신뢰와, 그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섞여 있었다. 서은채는 재훈과 오래 함께 던전을 돌았던 사이였다. 그가 무모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걔는... 늘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댔어. 이번에도 분명 뭔가를 확인했을 거야. 그리고 여기까지 왔어."
한도경은 그 말을 듣고도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확인했다가 저렇게 됐을 수도 있는 거잖아."
냉정한 지적이었다. 서은채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재훈은 이 방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대가로 치명상을 입었다. 그것이 상자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침묵이 잠시 방 안을 채웠다. 세 사람의 시선이 각자 다른 곳을 향했다. 민서는 상자를, 한도경은 재훈이 공격당했던 자리를, 서은채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어. 돌아가는 것도 답은 아니야."
한도경이 먼저 정적을 깼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단이 실려 있었다.
한도경이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열어보자. 대신 내가 앞에 선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물러나."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자세였다. 검집 끝이 바닥을 스치며 낮은 소리를 냈다.
스릉-
+++
세 사람이 상자를 중심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한도경이 반걸음 앞으로 나서서 상자와 민서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은채는 뒤쪽에서 언제든 회복 스킬을 쓸 수 있도록 손을 들어 올렸다. 민서는 그 뒤에서 뚜껑에 손을 올릴 준비를 했다.
'열겠다는 건가.'
그것은 세 사람의 대화를 통해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측했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자신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었다. 위장이 통했던 것은 여기까지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을 넘겨왔다. 사냥감들은 항상 조심스러웠고, 항상 의심했다. 그러나 결국은 열었다. 궁금함과 욕심을 이기는 조심성은 없었다. 그것은 그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열지 않고 지나간 자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다.
선택의 순간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열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먹어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답을 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뚜껑 안쪽, 촘촘히 박힌 이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참아야 했다. 조금만 더.
방금 맛본 핏물의 여운이 아직 몸통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여운만큼, 다음 사냥감을 향한 갈증도 함께 부풀어 있었다. 한 번 핥아 맛보았다고 굶주림이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번 맛본 뒤로는, 허기가 더 또렷해졌다.
그것의 감각이 세 사람을 하나씩 훑었다. 가장 앞에 선 자는 손에 쇠붙이를 쥐고 있었다. 위협적이었다. 뒤에 선 자의 손끝에서는 옅은 빛이 흘렀다.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뚜껑에 손을 얹고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
'저것부터.'
계산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민서의 손이 다시 뚜껑으로 다가왔다. 한도경의 검이 반쯤 뽑혀 나왔다. 서은채의 손끝에는 옅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민서의 손가락이 뚜껑 이음새에 걸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나무가 오래되어 삐걱이는 소리가 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상자는 조용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상하게 안 열리는데요."
민서가 살짝 힘을 더 주며 중얼거렸다. 뚜껑은 아주 조금씩, 정말로 아주 조금씩만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저들의 방심을 노릴 틈이 생길 것이었다. 뚜껑이 완전히 열리는 그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자를 향해 곧바로 튀어 오를 생각이었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다는 것도, 뒤에서 빛이 감도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산다. 지금부터는.'
지금까지의 규칙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는 순간, 규칙은 스스로 바뀌어야 했다. 숨어야 할 때와 튀어나가야 할 때는 명백히 달랐다.
한도경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랜 경험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인지, 그의 자세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민서, 조심해서-"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뚜껑의 틈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